언덕길을 오르자 짙은 금목서 향이 코끝을 스친다. 광주 남구 양림동은 한국 개신교 초창기,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이 복음의 깃발을 꽂은 곳이다. 가을이면 마을 전체가 금목서 향으로 덮이고 붉은 벽돌 담장과 오래된 가옥, 교회와 선교 기념비, 기념관이 언덕길을 따라 줄지어 있다.
양림동 언덕을 중심으로 광주양림교회, 수피아여학교, 광주기독병원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선교사 사택과 묘역이 보존돼 있어 광주가 왜 ‘빛의 도시’이자 ‘복음의 도시’라 불렸는지를 보여준다.
지난 7일, 광주 복음의 뿌리를 연구하고 지키고 있는 이재근 광신대 교회사 교수, 박용범 호남신대 교수, 조성용 광주양림교회(합동) 목사와 함께 양림동 일대를 걸었다. 박 교수는 최근 저서 ‘무등신학’(쿰란출판사)을 통해 양림동을 비롯한 지역 문화와 신학의 관계를 탐구하며, 도시의 역사·생태·영성을 아우르는 통합적 신학 모델을 제시한 공로로 광주광역시장 표창을 받았다. 광주 출신인 조 목사는 “양림동은 선교의 현장인 동시에 신앙의 골목길”이라며 “한 걸음마다 믿음의 선배들이 남긴 자취가 있다”고 말했다.
탐방의 중심지는 선교사 묘원이었다. 담장을 따라 난 오솔길 끝에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와 가족 26명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가 줄지어 있다. 서서평(Elizabeth J. Shepping, 1885~1934) 선교사의 묘비 아래에는 누군가 두고 간 노란 들꽃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서서평은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라는 좌우명을 남긴 간호선교사였다. 미혼모, 고아, 한센병 환자, 노숙인 등 가장 가난한 이들과 일생을 함께하며, 받은 선교 지원금의 절반을 헌금하고 14명의 입양 자녀를 돌봤다. 극심한 영양실조로 54세에 세상을 떠날 만큼 검소한 삶이었다.
양림동 묘원은 신앙의 유적지이자 시민들이 사랑하는 산책길이 됐다. 이날도 탐방객 몇몇이 묘비 앞을 지키고 있었다. 대구에서 왔다는 한영민 고산동부교회 부목사는 “소록도부터 손양원 유적지까지 둘러보고 왔다”며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열매를 맺어 우리가 누리고 있음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선교사들의 헌신은 광주의 근현대사에도 깊은 자취를 남겼다.
유진 벨(Eugene Bell, 1868~1925)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인 오방(五放) 최흥종(1880~1966) 목사는 그 상징적 인물이다. 박 교수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방탕한 시절을 보냈던 최흥종은 포사이드 선교사가 한센병 환자를 부둥켜안는 모습을 보고 인생의 방향을 바꿨다”고 말했다. 최 목사는 자신의 땅 1000평을 내어 윌슨 선교사가 ‘광주 나병진료소’를 세우도록 돕고 일생을 병자와 가난한 이웃을 위한 일에 바쳤다.
양림동에서 도심 방향으로 내려오면 광주기독병원이 보인다. 1905년 조셉 놀란(Joseph Nolan, 1850~?) 선교사가 세운 ‘광주제중의원’에서 출발해 120년의 역사를 이어온 곳이다. 병원 로비에는 선한 사마리아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2017년 개관한 제중역사관이 있다.
이곳에는 수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그중 박 교수는 허버트 카딩턴(Herbert Cardington, 1920~2003) 선교사 사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1949년 광주기독병원장으로 부임한 카딩턴은 25년 동안 결핵 환자와 빈민들을 위해 헌신했다. 박 교수는 “그는 ‘거지 대장’으로 불렸다”며 “도움을 요청하는 열 명 중 아홉이 거짓이라도 한 명은 진짜 도움이 필요하다는 믿음으로, 알고도 속아주는 사랑을 실천했다”고 말했다.
카딩턴과 함께 일했던 박재표 광주기독병원 원목실장은 “카딩턴은 경영보다 구제를, 행정보다 위로를 중시했다”며 “퇴근 후엔 전도지를 들고 골목마다 다녔고 남자 환자에겐 시계 수리, 여성 환자에겐 재봉을 가르치며 치료 이후의 삶까지 고민했던 분”이라고 전했다.
카딩턴은 은퇴 후에도 안식을 택하지 않았다. 1974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방글라데시로 건너가 25년을 더 섬겼다. 그는 선교 편지에 “우리 모두 거지들이고, 다만 다른 거지들에게 생명의 빵이 어디 있는지를 알려줄 수 있을 뿐”이라고 썼다.
광주의 복음은 언제나 고난의 현장과 함께 있었다. 1919년 3월 10일,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광주천을 따라 내려와 부동정 장터(현 동구 불로동)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서울의 3·1운동이 있었다면, 광주에는 3·10운동이 있었다. 광주제중의원 회계였던 황상호는 병원 지하에서 ‘조선독립광주신문’을 인쇄해 나누어 줬다. 복음이 정의의 언어로 번역된 현장이었다.
1980년 5월, 광주기독병원은 또 한 번 시대의 고통을 품었다. 계엄군의 발포로 부상자들이 몰려들자 병원은 수술실과 분만실, 복도까지 개방했다. 의료진은 밤을 새워 환자를 돌봤고 시민들은 피를 나눴다. 박 원목실장은 “우리 병원은 단순한 의료기관이 아니라, 복음으로 병든 도시를 품은 공간”이라고 말했다.
당시 광주기독병원뿐 아니라 인근 교회에서는 환자들을 위해 주먹밥을 만들어 날랐고 시민군에게 숙식을 제공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광주YWCA와 YMCA 등 주축이 되어 시민수습대책위원회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 교수는 “광주는 복음의 유산이 도시 전체를 지탱해온 곳”이라며 “약자를 돌보고 사랑과 친절을 베푸는 초대교회의 정신이 선교사들의 섬김과 신앙 선배들의 헌신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이어 “교회를 살리는 것은 규모가 아니라 유산과 자부심이며 광주는 교회가 도시를 살리고 신앙이 문화를 바꾸는 힘을 보여주는 도시”라고 덧붙였다.
광주=글·사진 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