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명심해. 대기업 25년 차 부장으로 살아남아서 서울에 아파트 사고, 애 대학까지 보낸 인생은… 위대한 거야.”
통신 대기업 부장 김낙수(류승룡)는 남 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높은 경쟁률을 뚫고 대기업에 당당히 입사했고, 진급 누락 한번 없이 부장 자리에 올랐다. 번듯한 서울 자가에 살며 아들을 명문대에 보냈다. 한데, 마음 한구석이 휑하다.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왠지 외톨이인 것만 같다.
JTBC 토일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이하 ‘김 부장 이야기’)가 요즘 중년 남성들 사이에서 화제다. 너도나도 “내 얘기”라며 열렬한 공감을 표한다. 현실 고증에 충실한 ‘극사실주의’ 드라마라는 평가도 나온다. 지난달 25일부터 방송돼 넷플릭스에도 공개 중인 작품은 국내 TV쇼 부문 시청 1위로 올라섰다.
송희구 작가가 실제 대기업에 근무하면서 쓴 동명 소설이 원작이라 현실을 반영한 내용이 촘촘히 담겼다. 선배 승진을 위해 후배 팀원들의 고과 점수를 몰아주거나 지방 인사 발령으로 퇴사를 종용당하는 장면 등이 그렇다. 지방으로 좌천당한 동기를 동정하며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안심하던 낙수는 본인도 같은 처지가 되고 만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실제로 부장 이후 승진을 못 하면 회사를 나가야 하는 게 현실인데, 이런 설정이 중장년 남성들에게 큰 공감대를 얻고 있다”고 짚었다. 윤석진 드라마평론가는 “회사에서 어렵게 자리 잡고도 언제 밀려날지 모르는 불안정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드라마로까지 봐야 하냐’ 싶을 정도로 사실적”이라고 말했다.
낙수의 삶은 끊임없는 비교와 경쟁의 연속이다. 회사가 주목하는 성과를 내고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전문대 출신이라 무시하던 후배가 옆 팀 부장이 돼서 앞서가니 불안하다. 강남·서초의 수십억원짜리 고급 아파트를 보유한 후배, 매달 월세 3000만원을 받는 건물주 동창에겐 남모를 열패감을 느낀다. 부동산 투자로 큰돈을 번 부하직원도 고깝게 보인다.
여성 시청층을 겨냥한 보통 드라마와 달리 중년 남성을 주인공으로 세운 점이 특징이다. 중년의 초라함을 비추면서도 경쾌함을 놓치지 않는다. 특히 낙수의 ‘꼰대’ 면모가 드러나는 장면이 웃음 포인트다. 팀원들과 친한 옆 부서장을 부러워하며 자기 팀원들에게 ‘핸드드립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하더니 탕비실에서 커피믹스를 타 주며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다. 외제차를 타고 출근하거나 바쁠 때 반차를 쓰는 후배가 못마땅해 꼭 한소리씩을 한다.
자칫 밉상일 수 있는 낙수에게 짠한 마음이 드는 건 배우 류승룡 특유의 친근하고 능청스러운 연기 덕분이다. 류승룡은 최근 제작발표회에서 “(50대인) 지금 내 상황과 같다. 아직 젊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보지 않는 시선이 느껴지고 ‘영포티’라는 슬픈 말도 듣는다”며 “누군가의 미래, 과거, 혹은 현재를 담고 있어 전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나를 투영하게 되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정 평론가는 “자신이 그렸던 미래와 실제 맞이한 현재 사이에 괴리를 느끼는 중년의 비애를 절묘하게 짚었다”고 평했다. 중년 남성 이야기를 통해 세대 공감을 끌어낸다는 분석도 있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소통 부재의 시대에 아빠와 아들, 상사와 부하직원 등 세대 간 역지사지를 통해 서로 존중하자는 메시지를 전하는 점이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