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목회자포럼(회장 이기용 목사)은 6일 서울 영등포구 신길교회에서 ‘열린 토론 광장’을 열고 교회의 대사회적 신뢰 회복 방안을 논의했다. 목회자들은 교회 안에 여전히 돈과 권력을 특별히 대우하는 문화가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사회의 신뢰를 얻기 위해선 먼저 교회 내부의 자성과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아래는 ‘한국교회, 열린 토론 광장’ 2부 주제로 진행된 ‘교회와 사회’ 전문.
사회=이기용 신길교회 목사
△이기용 목사=우리들의 리그 속에서 시대정신을 잃어가고 있지 않나. 더 심도 있게 나누는 시간을 가지며 위기의 시대 한국교회의 희망의 길을 찾는 시간 가지려 한다. 교회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의외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복음화율에는 포함되지만 실제로 공동체에 참여하지 않는 가나안 성도들이 있다. 26.6%다. 기독교인 10명 중 3명은 교회에 나가지 않지만 개신교인으로 분류된다. 이 비율이 대책하지 않으면 2033년까지 37.1%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10명 중 4명 정도가 교회 공동체에 참여하지 않는 셈이다. 저출산, 양극화 문제로 시대정신을 잃고 신뢰도도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교회는 이 속에서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나눠보려 한다. 한국교회는 왜 사회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공동체가 되었나. 앞으로 부정적 이미지가 더 증가하지 않을까 하는 통계가 나오고 있다.
△최윤식 박사=사실 지금 사회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나고 있다. 사회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면 사람들의 생각도 많이 바뀌게 된다. 가나안 성도라는 화두를 던졌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가나안 성도가 증가하는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교회 신뢰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교회 성도들 자체가 교회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 오기를 싫어하면서도 기독교를 떠나기 싫어 가나안 성도가 되는 경우가 있다. 둘째는 좋지 않은 현상인데, 기독교가 종교의 영역을 지나 문화로 가버리는 현상이다. 예배자의 믿음이라기보다 ‘나는 기독교인이다’라는 문화적 정체성이 좋아서 트렌드처럼 소비되는 것이다. 셋째는 코로나19 이후 급격한 기술 발전 때문이다. 비대면 기술이 확산되면서 오프라인 중심의 신앙생활 대신 다른 형태의 예배와 공동체 생활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고, 그 결과 가나안 성도로 머무는 경우가 생겼다.
△이인호 목사=신뢰의 문제는 단순한 행위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우리 교회 교역자들 중에도 유능하고 나에게 잘하지만, 이상하게 믿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게 인테그리티(Integrity)의 문제다. 한국교회의 신뢰성이 계속 떨어진다는 것은 결국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팎에서 만난 사람들을 믿을 수 없다고 느낀다는 뜻이다. 이건 인격과 성품의 문제이며, 하루아침에 생기는 게 아니라 교회의 열매라고 본다. 교회가 곧 사람이니까, 신자가 성숙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닮지 못했다는 근본적인 문제다. 결국 성도를 훈련하고 양육하는 부분에서 교회의 수준이 드러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공공성의 문제다. 한국교회는 마치 졸부처럼 많은 것을 가졌지만 책임을 알지 못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그런 상황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만, 한국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천주교나 불교는 중앙집권적으로 움직이지만, 개신교는 끊임없이 개척을 하고 개교회주의에 빠져 있다 보니 한몸 된 의식이 약하다. 그러다 보니 사회에 비춰지는 모습은 책임과 영향력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주변에 선을 행하고 인류의 기본적 가치에 기여하는 의식이 부족하다.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본다.
△이기용 목사=말씀과 삶의 균형의 문제인 듯하다. 그만한 책임적인 부분들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기채 목사=말씀하신 대로 언행일치의 삶을 사는 데 우리가 실패한 요인도 있다. 이인호 목사님 말씀 중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이 공적 영역에서도 표현돼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교회가 게토화돼 우리끼리만, 교회 안에서만 봉사하는 형태로 머무르고 있다. 세상 속으로 나아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교회가 문화화되고 있다고 하지만 기독교 시대에 비해 문화화에는 실패한 것 같다. 기독교적 가치를 정치나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스며들게 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큰 효과를 냈을 것이다.
기독교적 가치를 지닌 시민운동에도 교인들이 적극 참여해야 한다. 낙태 문제, 저출산과 고령화, 동성애 이슈 등 심각한 사회 문제 속에서 기독교의 가치와 이상을 실제 삶에서 실현하는 움직임이 저변에 확산된다면 비신자들도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접하게 될 것이다. 이는 전도에도 도움이 되고, 신앙생활에서도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가는 데 유익할 것이다.
△박성민 목사=실질적으로 교회가 세상을 향해 많은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왜 신뢰를 잃을까 생각해본다. 교회가 좋은 일을 해도 그 의도가 읽히는 경우가 있다. 전도를 위해서, 교세 확장을 위해서 하는 것 아니냐는 시선이다. 세상을 향한 행위 자체가 이미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이라고 봐야 하는데, 그것을 단순한 과정으로만 여긴 것이 문제라 생각한다. 세상 용어로 말하면 이제는 ‘피보팅’ 즉 방향을 바꿔야 한다. 초점을 우리 중심에서 세상 중심으로 옮겨야 한다.
또 교회 안을 보면 돈이 많거나 권력이 있는 사람을 특별히 대우하는 모습이 있다. 야고보서에서 지적한 그 모습이 지금 한국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권력 중심, 세상과 닮은 구조에서 벗어나 소외된 이웃을 향해 초점을 돌리는 것, 그것이 지금 한국교회가 반드시 해야 할 중요한 전환이라고 생각한다.
△장동민 교수=역사를 돌아보고 실천적인 것 말하겠다. 과거 한 세기 동안 교회는 영광스러운 시대를 보냈다. 그때는 사회적 신뢰도도 높았고, “나는 제사를 지내야 해서 교회는 못 가지만 자녀는 보내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교회는 문화적으로도 세상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고, 담을 쌓고 폐쇄적인 집단으로 여겨져도 사람들은 그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 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며 신뢰가 떨어졌고, 교회는 조롱과 차별, 혐오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폐쇄적으로 사회적 담을 쌓고 있다.
동네 사람 누구나 들어오게 하고 선한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회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너무 과거에 머물러 있다. 이 모임(국민일보목회자포럼)도 그렇다. 정치 집단이든 학문 집단이든 요즘은 패널을 초청할 때 여성 비율을 높이려 한다. 그런데 여전히 성공한 목회자 중심, 남성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사회적 약자를 말하지만 정작 사회적 약자는 보이지 않는다.
공공성이라는 건 그런 것이다. 의도가 들키고 안 들키고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은 능력주의 사회다. 능력을 인정받아야 하는 시대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 은혜를 받은 공동체다. 다른 사람을 돕더라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 그런 태도라면 아깝지 않고, 문을 여는 것도 훨씬 자유로워질 것이다. 결국 공공성의 핵심은 우리가 은혜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김문훈 목사=사회적으로 봉사활동 할 때, 아까 ‘빛과 소금 얘기’를 하셨다. 촛대는 스스로 타서 없어지면서 빛을 내고, 소금은 자신이 녹아 없어지며 맛을 낸다. 교회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촉매가 되려면 의도적인 영향력보다 희생적인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 또 하나는 순수해야 한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강박관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효과를 얻으려는 강박관념이다. 그러나 초대교회부터 교회는 소수를 위해 존재했고, 성도들은 멸시받았다. 세상의 인정을 얻으려 애쓰기보다 말없이 촉매적 역할을 감당하며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겨자씨가 숲을 이루고 누룩이 반죽을 변화시키듯이, 교회는 그렇게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사회적 인정에 대한 강박을 버리고, 스스로 희생하며 묵묵히 걸어가는 것, 그 길 위에서 소자와 빈자, 약자를 향한 관심을 잃지 않는 것이 예수님의 방식이었고, 그것이 곧 교회의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김형근 목사=코로나 이후 한국교회가 대사회적인 지탄을 받고 많은 어려움이 노출된 건 사실이다. 또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여러 문제들을 뽑자면 360가지쯤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자정의 역할을 할 수 있고 스스로를 정화시킬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면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고,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우리가 다시 주목해야 한다. 사회 속에서 사랑과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건, 어찌 보면 초대교회 때 성령이 임하자 그들이 변화된 것처럼 우리도 다시 성령의 역사 안에서 변화돼야 한다는 의미다.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 사도의 이야기를 듣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었고, 박애와 사랑 실천운동이 진행됐다. 공동체가 어떤 모임이기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을까, 또 어떻게 유무상통하는 시스템을 갖출 수 있었을까를 주목해봐야 한다. 그것이 부흥 아니겠는가. 1907년 당시 우리는 가난하고 빈약한 나라였지만, 나눔과 사랑, 부흥의 실천이 있었다. 부흥운동은 단순히 사회를 사랑하기 위한 초점이 아니라, 먼저 교회 자신이 정화되고 자정이 되고, 성령의 역사로 열매를 맺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될 때 교회 주변 사람들이 변화될 것이라 생각한다.
미국도 전쟁에서 진 적이 없었지만 베트남전에서 패했다. 그때 반기독교 세력이 나타나고 히피문화가 퍼졌으며, 시민 불복종운동까지 나타났다. 그런데 교계에서는 크래독 박사 같은 인물이 ‘권위 없는 자처럼 섬겨야 한다’는 자정운동을 일으켰고, 혁신이 일어났다. 이후 예수운동이 일어났고, 히피들이 갈보리채플 척 스미스 목사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며 대사회적인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도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진짜 성령 안으로 들어가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자연스럽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이기용 목사=사회와 약자를 섬기는 교회가 70% 이상이라는 통계가 있음에도, 왜 사회는 여전히 교회를 부정적으로 볼까. 이건 ‘딜리버리 이미지’의 문제는 아닐까. 불통의 이미지, 권위적인 이미지, 수직적인 이미지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이미지 문제도 분명히 있다. 태안 앞바다 기름유출 사건 당시 자원봉사자 200만명 중 70~80%가 기독교인이었다. 그럼에도 사회의 인식은 달라지지 않았다. 교회의 메시지가 어떻게 전달되고 있는지, 딜리버리의 문제를 다시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박성민 목사=아까도 말했듯 전도와 우리의 역할, 하나님의 기대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감당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우리(교회)가 나누되 교회 이름을 좀 뺐으면 좋겠다. 지역사회에 필요한 일을 교회가 그냥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걸고 하면 된다. 왜냐하면 의외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젊은 층이 여전히 관심이 많다. 교회를 떠났을지라도 예수님을 떠난 것은 아니라는 통계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벽을 한번 뛰어넘기 위해서라도 교회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말한 ‘피보팅’은 개교회의 한계를 넘어 방향 자체를 바꾸자는 뜻이다.
△최윤식 원장=동의한다. 많은 분들이 교회의 처치 브랜딩을 교회 이름을 내거는 일로 오해한다. 그런데 세상이 원하는 교회의 이미지는 특정 교회의 이름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네임이 위압감을 준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교회가 섬기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이 교회의 이미지를 높이는 데 훨씬 효과적이다.
△한기채 목사=이미지 메이킹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정보가 너무 많이 쏟아진다. 그래서 분별력, 특히 영적 분별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지혜롭게 그러면서도 진리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소통하는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 사회에서도 여러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어 이전에 교회가 하던 일들을 이제 사회가 대신하고 있다. 살피지 못한 영역, 의도를 가지고 하는 일들도 많다. 교회가 좀 더 순수하게 시민운동 차원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사역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예수님 말씀 가운데 답이 있다.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워라.” 세상은 뱀처럼 교활하다. 우리는 그것을 무시해서는 안 되고, 단순히 비둘기처럼 순결한 차원에만 머물러서도 안 된다. 세상이 한 번 머리를 쓰면 우리는 두 번이라도 써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대안을 찾아야 한다. 정치 문제도 마찬가지다. 너무 편 가르기에 익숙하다. 심지어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하나님, 제 편이 되어주세요”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링컨의 기도처럼 “내가 하나님 편이 되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해주세요”라고 해야 한다.
신자들조차 하나님을 부리려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 자기 목적을 이루려는 이기적인 신앙 태도가 세상 사람들에게 다 드러났다. 그래서 우리는 부단히 깨어서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 뜻에 합하게 살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분별력으로 가장 지혜롭게, 그러나 현실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세상에는 이상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덜 악한 것을 선택해야 할 때도 있다. 투표도 덜 나쁜 사람을 뽑는 과정이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상 속에서, 교회는 사회와 문화, 정치 문제를 다룰 때 더 많은 아이디어와 더 많은 기도, 그리고 분별력 있는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장동민 교수=지금 우리가 미디어에 대해 어떤 전략을 가져야 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미디어 환경은 기독교에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960년대 미국으로 간다. 그때 할리우드를 비롯해 대부분의 미디어 환경이 진보적인 흐름으로 바뀌었고, 그곳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한국에 와 1980년대에 대학에서 가르쳤다. 그 시기 반기독교 정서가 대학가에 팽배했고, 그 세대가 지금의 미디어를 지배하는 주체가 되었다. 그래서 미디어 환경은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교회에 우호적이지 않다. 코로나를 지나면서 그 현상은 더 심화됐다. 방송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레거시 미디어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큰 그림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물리적으로 맞서거나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외치는 방식은 오히려 혐오를 조장한다는 오해를 받기 쉽다. 기독교적 가치관을 어떻게 사회 속에서 구현할 것인가가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비기독교인이라도 선한 능력과 영향력, 그리고 선한 영성이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영은 교회 안에서만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절대적 가치로서 자연계와 공적 영역 속에서도 역사하신다.
우리가 인정받으려 애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세상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 “내가 도와줄 테니 우리를 인정해 달라”는 태도가 아니라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을 이해하고 긍정할 때 비로소 소통의 창구가 열린다. 그런 접근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형근 목사=복음은 변하지 않지만 세상은 변한다. 다각도의 참여에 대한 시각들도 있다. 세상이 변함에 따라 리더십과 권위의 문제에 교회가 맞대응할 필요가 있다. 탑 투 바텀, 바텀 투 탑. 다시 말해 평신도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충분히 숙지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특수한 구조적 리더십 요소가 있다 보니, 젊은이들이나 사회가 교회를 볼 때 권위적이고 바뀌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과 장소, 예컨대 당회 등 교회 의사결정에서 청년·3040과 리더십을 나누며 계획을 세우고, 우리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도록 의도적으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연장선에서 리더십–팔로워 관계가 중요하다. 리더십의 포지션에 따라 부흥이 결정되고, 팔로워, 즉 성도들이 목회 철학을 따라올 수 있는 잠재 역량을 얼마나 갖추게 하느냐에 따라 부흥과 성장이 배가된다. 굳이 답하자면, 한국교회는 항해 중이다. 태풍이 오고 비가 오고 파도가 치면 넘어질 수밖에 없다. 이때 절대적인 성령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지탄이 있고 변화 없다는 비판이 있어도, 디아스포라가 복음을 증거했던 것처럼 대사회적 비판에만 맞추기보다 교회에 무엇이 부어졌는지를 물어야 한다. SNS나 미디어 활동에만 치우칠 것이 아니라 본질로 돌아가, 제3의 요소인 성령 하나님의 주도권,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그분이 이 사회적 상황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리더십이 면밀히 살피는 것이 지금 이 시대의 과제이다.
△박성민 목사=2017~2022년까지 5년 동안 신도 20대가 가장 많이 줄어들었다. 왜 줄었는지에 관해 우리는 고민을 많이 해야 한다. 청년들이 교회에 왔을 때 무엇을 얻어가는가. 그들의 필요가 채워지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목회 철학의 선명성이 필요하. 말씀에 근거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명확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이 아니라 훨씬 더 늦게 따라가고 있다. 그렇다면 속도가 아니라 방향에 관심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번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세 명이 ‘창조적 파괴’를 연구했다. 교회도 이제 그런 ‘창조적 파괴’의 관점에서 우리의 방향을 점검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이인호 목사=구체적인 사례를 말씀드리자면, 코로나 때 특히 어려웠던 이들은 방역을 맡은 공무원들이었다. 그 시기엔 목숨을 걸고 일해야 했고, 방역복도 부족했다. 교회가 한창 욕을 먹을 때였지만, 우리는 마스크와 방역복, 음식을 준비해 수원시청과 경기도청 방역과를 매주 목요일마다 방문했다. 처음엔 반응이 좋지 않았다. 교회 때문에 자신들이 고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중에는 오히려 반갑게 맞이하고, 우리가 준비한 음식을 기다릴 정도였다.
도시락과 돈가스를 준비하면서 주변 가게들에도 주문을 넣었다. 가게에서 “어디에 주려고 그러냐”고 물으면 “공무원분들께 드리려 한다”고 했더니 “그럼 우리도 참여하고 싶다”는 가게들이 생겼다. 그렇게 함께한 가게 이름으로 전달했고, 수원시장이 너무 고맙다며 교회와 가게들을 직접 방문해 조그만 꽃다발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사회적 필요를 따라 구청, 시청, 동사무소와 긴밀히 연대하면서, 우리 이름이 아니라 그들의 이름으로 사회 속에 들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조현삼 광염교회 목사도 대사회적 활동을 조용히 잘한다. 현장에 상시 365일 팀을 가동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섬기며, 늘 행정기관과 연대한다. 교회가 사회를 섬길 때도 그런 지혜가 필요하다고 본다.
△한기채 목사=지금은 프레임 전쟁의 시대다. 한국 사회의 불행은 이분화되어 극우와 극좌로 나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조차도 그 프레임 안에 맞추려 하고, 일부 세력은 교회를 그 틀 속에 끌어들이려 한다. 토론의 핵심은 다양성이다. 사실 극우·극좌로 나누기보다 진보와 보수로 구분하는 게 맞다. 한국교회는 보수적 입장을 갖고 있지만, 보수가 자유를 추구하듯 진보는 평등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사회 속에서 대안을 제시하고 예언자적으로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고, 더 건설적인 프레임을 만들어가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극우와 극좌는 결국 소수다. 거기에 교회가 몰입되지 않도록 방향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김동규 기자 k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