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뢰에 발목 잃은 해병, 의족 단 조종사로 다시 날다

입력 2025-11-06 11:40 수정 2025-11-06 16:52
공군의 제10기 국민조종사로 선발된 예비역 해병대 대위 이주은(32)씨가 지난달 18일 FA-50 비행 훈련 체험 중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공군 제공

공군의 제10기 국민조종사로 선발된 예비역 해병대 대위 이주은(32)씨는 지난달 18일 꿈에 그리던 FA-50 조종간을 잡았다. 전투기 조종사라는 평생의 꿈이 이뤄지던 순간, 하늘은 더 이상 먼 동경이 아니었다. 빛이 눈앞에서 번지자 도시의 윤곽은 흐려졌고, 모든 소음이 사라진 자리에 오직 하늘만이 눈앞에 가득 찼다.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햇빛이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이씨는 지난 4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 본관에서 국민일보와 만나 영공에 닿은 그 찰나를 이야기하며 잠시 말을 멈췄다. 그는 “하늘은 오래전부터 내 꿈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조용히, 아무 말 없이 나를 품어줬다”고 말했다. 이씨는 국민조종사 경험이 또 다른 삶의 기회가 됐다며, 다시 한번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꿈을 꾸고 있다고 웃어 보였다.

어렸을 적부터 이씨의 꿈은 전투기 조종사였다. 그는 민항공기나 수송기가 아닌 전투기를 동경한 이유에 대해 “하늘을 누비는 것도 멋지지만 그 하늘을 지키는 일이 더 큰 의미로 느껴졌다”고 했다.

그랬던 이씨는 2018년 여름 해병대 소위로 임관했다. 붉은 명찰을 달고 군인의 길을 걸었지만 마음 한켠은 여전히 조종사의 꿈을 기억했다. 그는 “하늘을 나는 꿈은 접었지만 그 하늘을 바라보는 마음만큼은 놓지 못했다”고 했다.

이씨는 임관 1년 뒤인 2019년 8월, 경기도 김포 한강하구의 한 소초에서 경계 작전을 수행하던 중 지뢰 폭발 사고를 당했다. 그 사고로 왼쪽 발을 잃은 그는 더 이상 전투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군을 떠났다. 하늘을 나는 꿈은커녕 제대로 걷기조차 쉽지 않은 현실을 마주했다.


예비역 해병대 대위 이주은씨가 4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에 마련된 제대부상군인 상담센터에서 국민일보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윤웅 기자

이씨는 자신을 다독이며 버텼다. 왼쪽 다리에 의족을 단 그는 그 시간을 묵묵히 견뎌냈다. 이씨는 “좌절하는 순간도 있었지만 누군가를 원망한 적은 없다”며 “돌이켜보면 부하들이 다치지 않은 것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잃어버린 꿈이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지만 하늘은 다시 그를 불러냈다. 이씨는 2023년 우연히 ‘국민조종사’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한순간 마음이 움직였고, 주저하지 않았다고 했다. 국민조종사는 일반 국민이 명예 조종사로 선발돼 실제 공군 조종사와 함께 전투기에 오르는 제도다. 후방 조종석에서 직접 조종간을 잡고 비행훈련을 체험할 수 있다.

1774명이 지원한 국민조종사 선발에 이씨도 도전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그는 끝내 이름을 올렸다. 의족은 장애가 아니었다. 이씨는 항공우주의료원에서 G-테스트와 4G 가속훈련, 중력 적응훈련 등 고강도 과정을 모두 통과했다. 그는 “몸이 아니라 마음이 하늘을 견디게 했다”고 회상했다.

결국 하늘은 다시 그에게 문을 열었다. 이씨는 서울공항에서 FA-50 조종석에 오르던 순간 잠시 눈을 감았다고 했다. 수많은 훈련과 사고의 기억, 그리고 포기하지 않았던 시간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는 “구름을 뚫고 하늘로 올라서자 지상의 건물이 장난감처럼 작게만 보였다”며 “영공에서 바라본 대한민국의 하늘은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고 회상했다. 특히 고향인 강원 원주 하늘을 지나던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가슴에 새겨졌다. 그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뛰놀던 운동장, 오래전 내 발길이 닿았던 골목들까지 눈 아래 펼쳐졌다”며 “하늘과 땅이 하나로 이어진 풍경에 넋을 잃었다”고 말했다.

이 경험은 새로운 삶의 기회를 발견하는 계기가 됐다. 이씨는 “모든 기다림이 의미를 되찾았다”며 “하늘이 오래전부터 내 꿈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착륙 지점으로 돌아가는데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과거의 좌절을 딛고 도전을 다시 시작했다”고 웃어 보였다.

예비역 해병대 대위 이주은씨가 4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에 마련된 제대부상군인 상담센터에서 국민일보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윤웅 기자

이씨는 다시 지상으로 돌아와 일상을 살고 있다. 그는 “하늘을 잠시 품었던 기억이 오늘도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했다. 이씨는 2021년 오세훈 서울시장에게 직접 제안해, 서울시에 부상 제대군인을 위한 상담센터를 설치했고 실장을 맡고 있다. 그는 자신처럼 부상으로 전역한 뒤 좌절에 빠진 군인들을 만나 심리적 회복을 돕고 있다.

이씨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내가 다시 일어선 것처럼, 그들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부상으로 전역한 동료들에게 이렇게 전했다. “꿈은 한 번 꺾였다고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언젠가 반드시 다시 날 수 있습니다.”

송태화 기자 alv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