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2월 16일 독일 카를스루에 음대에 재학 중이던 23살의 소프라노 임선혜는 에이전트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다음날 벨기에 앤트워프에서 고음악의 거장 필립 헤레베헤가 지휘하는 앤트워프 왕립 필하모니 공연에 설 수 있는지 묻는 내용이었다. 모차르트의 모테트 ‘기뻐하라, 환호하라’와 ‘c단조 미사’에 솔리스트로 출연하려다 하차한 소프라노의 대타를 급하게 찾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에이전트가 임선혜에게 “‘c단조 미사’의 아리아를 해봤어?”라고 물었을 때 임선혜는 “한국에서 여러 번 해봤죠”라고 답했다.
하지만, 임선혜의 대답은 거짓말이었다.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임선혜는 독일에서 벨기에로 가는 기차 안에서 7시간 동안 라틴어 가사를 달달 외웠다. 결과는 대성공. 헤레베헤는 열흘 뒤 독일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에서 예정된 모차르트 아리아 콘서트에도 임선혜를 출연시켰다.
이렇게 국제무대에 데뷔한 임선혜는 2000년 프랑크푸르트 오페라극장에서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으로 오페라 가수로서 첫발을 뗐다. 그리고 2001년부터 2003년까지 하노버 국립극장 단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프리랜서 성악가로 나선 그는 헤레베헤는 물론이고 르네 야콥스, 윌리엄 크리스티 등 고음악계 거장들의 러브콜을 받는 프리마돈나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바흐·헨델·하이든·모차르트 등을 주요 레퍼토리로 세계를 누비고 30여 장의 앨범에 참여한 그에게는 ‘고음악의 디바’ ‘바로크 음악의 여왕’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됐다.
‘고음악 디바’에서 ‘예술가곡 디바’로도 각광
“지난해 12월 18일 앤트워프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공연을 했어요. 알고보니 앤트워프 왕립 필하모니가 이름을 바꿨더라고요. 25년 전 데뷔할 때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오케스트라와 하루 차이로 공연하는 게 정말 신기했는데요. 공연 전날 리허설이 끝난 뒤 단원들에게 이야기했더니 예전 프로그램을 찾아서 보여주셨어요. 저의 25주년을 기념하는 선물 같은 공연이 됐습니다. 마침 이 공연보다 조금 앞서 헤레베헤 선생님과 샹젤리제 오케스트라의 베토벤 ‘미사 C장조’ 투어에 함께했는데요. 선생님께 25년 전 거짓말로 출연 기회 얻었던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다행히 선생님께선 재미있어하며 웃으셨어요.”
오는 12일 마포아트센터에서 리사이틀을 여는 임선혜는 데뷔 공연의 추억을 먼저 떠올렸다. 제10회 M클래식축제의 일환으로 열리는 이번 리사이틀은 25주년을 국내에서 마무리하는 공연이다. 최근 마포아트센터에서 만난 임선혜는 “데뷔한 지 25년이나 됐어도 여전히 노래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드린다. 헤레베헤 선생님과의 첫 만남을 비롯해 수많은 우연이 운명처럼 여기까지 나를 이끌어온 것 같다”고 말했다.
임선혜는 성악가로서 고음악과 오페라 외에 예술가곡으로도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참여한 ‘슐호프: 가곡 전곡’ 앨범은 2020년 발매돼 독일의 음반 비평가상을 받았고, 2023년 바리톤 토마스 햄슨과 함께 프란츠 리스트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가곡’을 녹음한 앨범 역시 호평받았다. 그리고 올해 안에 오스트리아 작곡가 에리히 볼프(1874~1913)의 전곡 음반 녹음에 7명의 성악가 중 1명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그런가 하면 그는 얼마 전 프랑스의 주요 예술가곡 콩쿠르인 나디아&릴리 불랑제 국제 가곡 듀오 콩쿠르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시와 음악이 결합된 예술가곡은 성악 레퍼토리 가운데 가장 지적이라고 생각해요. 먼저 시를 이해한 뒤 그 시를 음악 언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동료 피아니스트와의 호흡이 정말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슐호프, 볼프 등 독일어 예술가곡 음반에 동양인인 저를 부른 게 정말 영광스럽습니다. 나디아&릴리 불랑제 국제 가곡 듀오 콩쿠르 역시 동양인 심사위원은 저뿐이었어요.”
한국 가곡의 매력을 알리고 싶은 꿈
사실 임선혜는 대학 시절부터 가곡을 잘 불렀다. 그는 재학 중 국내 슈베르트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일본에서 열린 국제 슈베르트 콩쿠르에 초청돼 여자부 2위, 청중상을 받았다. 은사인 원로 소프라노 박노경 서울대 교수는 그에게 ‘가곡의 본고장’ 독일 유학을 권했고, 국내외 슈베르트 콩쿠르 입상은 그가 독일 정부 장학금을 받는 데 도움이 됐다. 고음악에서 먼저 스포트라이트를 받긴 했지만, 2008년 첫 국내 리사이틀을 고음악이 아닌 가곡으로 채운 것은 가곡에 대한 그의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그는 한국 가곡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앞서 2011년 스위스 프루브르 가곡 페스티벌에서 한국 가곡 리사이틀을 열게 됐을 때 유럽 언론으로부터 ‘한국에도 예술가곡이 존재하냐’는 질문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관객이 한국 가곡을 이해할지 걱정했지만, 번역된 가사를 읽은 관객들은 그의 노래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후 그는 국내외 리사이틀 프로그램에 한국 가곡을 꼭 넣고 있다. 지난달 제1135회 하우스콘서트에선 한국 가곡의 역사 100년을 렉처 콘서트 형식으로 선보였다.
“하우스콘서트에서 1926년 김형준 시·홍난파 곡 ‘봉선화’부터 2023년 나태주 시·손일훈 곡 ‘소망’까지 100년을 훑어봤는데요. ‘봉선화’의 경우 일제 말기 처음 무대에서 불렀던 소프라노 김천애 선생의 음원을 들려주면서 제 노래가 오버랩되는 공연을 선보였고요. 또 1933년 나온 정지용 시·채동선 곡 ‘고향’은 정지용이 월북 문인으로 규정돼 금지되면서 박화목의 시 ‘망향’, 이은상의 시 ‘그리워’, 이관옥의 시 ‘고향 그리워’를 가사로 사용함에 따라 같은 선율에 가사가 다른 곡 4개가 나온 이야기를 노래와 함께 들려드렸어요. 관객 반응이 좋아서 이런 형태의 공연을 앞으로도 종종 하려고 합니다. 저 역시 공연을 준비하면서 많은 공부가 됐어요.”
남자 대신 여자가 부르는 세레나데의 매력
마포아트센터에서 12일 열리는 리사이틀에서 임선혜는 올해 M클래식 축제의 주제인 ‘낭만시대’에 맞춰 세레나데와 한국 가곡을 선곡했다. 1부는 슈베르트, 브람스, 슈만, 포레, 번스타인 등이 작곡한 로맨틱한 세레나데로 구성됐다. 그리고 한국 가곡으로 구성된 2부는 김상옥 시·윤이상 곡 ‘그네’를 비롯해 서정주 시·정회갑 곡 ‘입맞춤’ 등 사랑에 대한 노래들이 준비됐다. 특히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 대목을 전인평 작곡가가 가곡으로 편곡한 노래를 초연한다. 지난달 하우스콘서트에서와 마찬가지로 피아니스트 문재원, 첼리스트 이호찬이 함께한다.
“세레나데는 ‘연인을 향해 밤에 부르는 노래’인데요. 대체로 남자가 부르죠. 하지만 이번엔 여자가 부름으로써 다른 매력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랑가’는 한국 가곡 가운데 가장 신경을 쓰는 노래인데요. 작곡가 전인평 선생님과는 판소리 심청가 중 뺑덕의 소리를 가곡으로 바꾼 ‘뺑덕어미’를 2011년 부른 게 첫 인연이었습니다. 이번 ‘사랑가’는 아예 저를 위해 곡을 만들어 주신 만큼 열심히 연습하고 있습니다.”
국제무대 데뷔 25주년을 마무리하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그의 목표는 한국 가곡 음반을 해외 레이블에서 내는 것이다. 그는 “한국 가곡의 매력을 세계에 알리려면 국제적 배급이 가능한 음반사에서 발매해야 한다”면서 “10년 전부터 품고 있는 꿈이지만 아직도 실현하지 못했다. 다만 최근 제 꿈을 도와주시려는 분들이 계셔서 머지않은 시기에 좋은 소식을 들려드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