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유일 ‘입자치료 융합도시’ 도전…부산, 정밀 암 치료의 새 장 연다

입력 2025-11-03 19:08
이창훈 동남권원자력의학원장이 3일 해운대 그랜드 조선 부산에서 열린 ‘동남권 양성자치료센터 구축사업’ 업무협약식에서 사업 추진 경과를 설명하고 있다.

# 사례. 부산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박모 씨(37)는 지난달 5세 둘째가 잦은 구토와 두통을 호소해 병원을 찾았다가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치료 방법은 양성자 치료뿐이었다. 그러나 해당 장비가 있는 병원은 수도권 두 곳(국립암센터·삼성서울병원)뿐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결국 그는 첫째를 남편에게 맡기고 둘째와 함께 서울에서 장기 치료를 받고 있다.

부산은 오랫동안 암 발생률과 암 사망률이 전국 1위를 기록해 왔다. 첨단 치료 기기인 양성자치료기와 중입자치료기는 모두 수도권에 집중돼 있어 부산 환자의 60% 이상이 서울·경기권으로 치료를 떠난다. 부산시가 이런 불균형을 바꿔보겠다며 내놓은 해법이 바로 ‘입자치료 클러스터’다.

부산시는 3일 해운대 그랜드 조선 부산에서 기장군·동남권원자력의학원·부산과학기술고등교육진흥원(BISTEP)과 양성자치료센터 구축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창훈 동남권원자력의학원장은 “양성자치료센터 구축은 단순한 시설 건립이 아니라 방사선 의과학 연구와 산업을 아우르는 미래 혁신사업”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2020년 대형가속기 장기 로드맵 수립을 시작으로 5년간 타당성 조사와 정책 협의를 거쳐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기획사업 승인받았다”며 “기장군 방사선의과학산단을 세계 수준의 입자치료 허브로 키워가겠다”고 밝혔다.

그는 “동남권은 인구 800만명이지만 양성자치료기가 한 대도 없어 매년 약 900명의 환자가 수도권으로 떠나야 한다”며 “양성자와 중입자치료는 각각 다른 특성을 가진 상호보완적 기술로, 두 치료법을 결합한 입자치료 클러스터가 완성되면 세계적으로도 드문 의료복합단지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원장은 양성자와 중입자치료의 차이를 “닭 잡는 칼과 소 잡는 칼”에 비유했다. 그는 “중입자는 한 번에 강하게 암세포를 파괴하는 고에너지 치료로 췌장암·육종 등 난치성 고형암에 적합하고, 양성자는 성장기 아동이나 두경부암 환자처럼 정상조직 보호가 중요한 환자에게 정밀하게 적용된다”며 “두 치료법을 함께 갖춘 곳은 세계적으로 다섯 곳뿐이며, 부산이 그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동석 부산시 첨단산업국장. 국민일보DB

박동석 시 첨단산업국장은 “중입자치료가 망치로 암을 내리치는 치료라면, 양성자치료는 바늘로 암세포만 정밀하게 찌르는 치료”라고 말했다. 그는 “정상세포 손상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기술이라 성장기 어린이에게 특히 필요하다”며 “이번 사업은 의료의 패러다임을 ‘정밀 타격형’으로 바꾸는 시도”라고 했다. 이어 “현재 중입자치료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지만, 양성자치료는 보험이 적용돼 환자 부담이 훨씬 적다”며 “경제성과 접근성 측면에서도 센터 건립의 의미가 크다”고 덧붙였다.

박 국장은 “실제로 양성자치료는 전국 환자 중 17%도 치료받지 못하고 있다”며 “매년 8000~9000명이 치료 대상이지만 서울 두 병원에서 연 1500명 정도만 치료가 이뤄져 대부분 대기 상태에 놓인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성장기 아이들은 치료 타이밍이 생명인데, 이를 놓치면 정상세포 발달에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준다”며 “부산이 영남권 환자 수요를 맞추고, 나아가 수도권 환자까지도 치료할 수 있는 거점이 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양성자와 중입자 가속기를 동시에 갖춘 곳은 일본·미국·독일 등 다섯 나라뿐이며, 부산은 여기에 유전자세포치료(GMP) 시설까지 결합한 세계 최초의 융합형 암치료 허브를 구축하게 된다”고 밝혔다. 그는 “루테튬·악티늄 같은 차세대 의료용 방사성동위원소를 국산화해 수출할 수 있는 산업 생태계를 만들겠다”며 “방사선의약품·면역항암제·유전자세포치료를 결합한 새로운 치료 융합 모델을 실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그는 “양성자 가속기는 암 치료에 그치지 않고, 반도체 웨이퍼 중성자 도핑, 우주 방사선 연구, 방사성 동위원소 생산 등 다양한 산업으로 확장할 수 있다”며 “부산을 의료와 과학기술, 산업이 맞물린 첨단 융합도시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실제 부산은 서울대병원이 추진 중인 중입자치료센터(2027년 완공 예정)와 이번 양성자치료센터를 연계해 ‘선형가속기–양성자–중입자’로 이어지는 국내 유일의 입자선 치료 인프라를 완성한다. 연간 8만명의 방사선치료 환자 중 10%(약 8000명)가 양성자치료 대상이지만, 수도권 두 기관의 연간 치료 능력은 1500명에 불과하다. 부산은 이를 통해 암 환자의 원정 치료를 줄이고, 전국 의료 균형을 회복하겠다는 목표다.

시는 이번 사업을 2032년 완공을 목표로 추진 중이다. 총사업비는 약 2500억원 규모로 추산되며, 사업 기간이 늘어날 경우 예산도 확대될 전망이다. 이에 박 국장은 “정부의 지방균형발전 기조에 맞춰 과기부와 긴밀히 협의하고 있으며, 패스트트랙을 통해 예비타당성조사(예타) 면제도 검토하고 있다”며 “속도를 높여 영남권 의료 접근성을 조기에 개선하겠다”고 설명했다.

시는 과기부·기장군·의학원과 협력해 실무협의체를 구성하고 단계별 사업기획 용역을 진행 중이다. 시가 지난해 진행한 ‘동남권 첨단 암치료 허브 구축 전략’ 용역에서는 양성자치료센터 도입 시 생산유발효과 2512억원, 부가가치 778억원, 취업유발 1286명으로 추산했다. 시는 의료 접근성 향상과 지역 산업 혁신이 동시에 일어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든다는 구상이다.

이 원장은 “가속기 기반 연구 인프라는 단순한 치료를 넘어 방사선 의·생명 연구의 핵심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동남권원자력의학원은 연구센터, 병원, 방사선비상진료센터를 모두 아우르는 기관으로, 그동안 공식 명칭만 사용했지만, 이제는 시민들이 병원임을 쉽게 인식할 수 있도록 진료 부문에서 ‘원자력병원’ 명칭도 함께 쓰고 있다”며 “치료와 연구, 산업이 함께 성장하는 방사선 의과학 중심도시로 부산이 도약하도록 기여하겠다”고 덧붙였다.

글·사진=윤일선 기자 news828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