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1월 한국에 들이닥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는 온 나라를 뒤흔들었다. 잘 나가던 회사와 은행이 줄줄이 문 닫고 직원들은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어린 자녀까지 함께 길거리에 나앉은 가족, 실직한 회사원들로 붐비는 인력시장의 풍경은 당시 사회상을 보여주는 쓰라린 단상이다.
충격과 절망에 휩싸였던 나라는 이내 희망을 싹틔웠다. 그 동력은 역시 ‘사람’이었다. 전 국민이 장롱 안 금붙이를 꺼내 십시일반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섰고, 각자 위치에서 쉬지 않고 일했다. 암울했지만 한편으론 역동적이었던, 그 시절을 불러낸 드라마가 최근 인기몰이 중이다. tvN 토일드라마 ‘태풍상사’ 얘기다.
드라마는 서울 강남 압구정 나이트클럽을 주름잡던 오렌지족 강태풍(이준호)이 건실한 상사맨으로 거듭나는 고군분투 성장기를 그린다. IMF와 함께 아버지(성동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 도산 위기에 처한 무역회사를 물려받은 태풍은 업무에 빠삭한 경리 직원 오미선(김민하)의 도움으로 갖은 어려움을 딛고 회사를 꾸려간다.
90년대 향수와 복고 감성을 자극한 드라마는 첫 회부터 화제를 모아 2일 방송된 8회에선 시청률 9.1%(닐슨코리아·전국 기준)로 자체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굿데이터코퍼레이션의 펀덱스가 발표한 10월 4주차 TV-OTT 드라마 부문 화제성 조사에서도 1위에 올랐다. 출연자 화제성에선 이준호가 1위, 김민하는 4위에 이름을 올렸다.
완성도 있게 구현된 시대 고증이 90년대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보는 재미를 선사한다. 부분 염색으로 브리지를 넣거나 당대 인기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의 안재욱 머리를 따라 한 헤어스타일, 갈매기 눈썹이나 입술 라인을 진하게 그리는 화장법 등이 눈길을 끈다. 삐삐와 씨티폰, 팩스, 플로피디스크, 카세트테이프, 텔렉스(전신타자기) 같은 소품 하나하나가 추억을 되살린다.
생활 방식도 고스란히 재현했다. 겨울에 아궁이 연탄을 때서 난방하고, 차 안에 방향제 대신 모과 바구니를 두며, 내비게이션 대신 종이지도를 보고 장거리 운전을 하는 등의 장면이 세심하게 배치됐다. 당시 방송에서 많이 쓰던 “~하거든요” 식의 서울 사투리 말씨도 자주 등장한다. 연출을 맡은 이나정 감독은 “97년 당시를 진정성 있게 고증하는 것이 이 드라마의 정체성이라 생각했다”고 전했다.
작품의 주제는 “사람이 꽃보다 더 향기롭고 돈보다 더 가치 있다”는 태풍 아버지의 유언으로 갈음된다. 극 중 태풍은 위기 상황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극복한다. IMF라는 냉혹한 현실을 견디게 하는 힘은 결국 평범한 사람들의 연대라는 것이다. 역경을 딛고 나아가는 태풍의 힘찬 발걸음은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전한다.
에피소드마다 태풍이 새로운 사건을 맞닥뜨리고 해결하는 전개가 반복되는 점은 단조로우나, 이런 극복의 서사를 통해 강조하는 바는 명확하다. 윤석진 드라마평론가는 “지나치게 시련과 고난에 초점을 맞춘 전개 방식에 답답한 면이 있다”면서도 “위기에 대응하는 두 주인공 강태풍·오미선의 삶의 태도를 통해 희망을 이야기하는 점이 매력적”이라고 평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IMF라는 위기 상황을 되레 성취의 과정으로 비튼 역발상이 돋보인다”며 “노력만으로 성공하는 게 쉽지 않은 요즘 젊은 세대에게, 어려운 상황에도 성장과 성공을 이뤄내는 강태풍·오미선의 낙천적 모습이 주는 판타지가 크다. 당시를 살아낸 중장년층에겐 향수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