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차를 탄 여자’ 트라우마 씻어낸 여성들의 용기와 연대

입력 2025-11-02 17:38
영화 ‘하얀 차를 탄 여자’의 한 장면. 바이포엠스튜디오 제공

새하얀 설산의 도로를 달리는 차 한 대. 병원에 도착한 도경(정려원)은 정신없이 맨발로 운전석에서 내린다. 복부 자상으로 피투성이가 된 언니 은서(김정민)를 차에서 끌어 내리며 “도와 달라”고 울부짖는다. 사건 담당 경찰 현주(이정은)는 도경을 만나 진술을 듣는데, 횡설수설하는 그의 말이 어딘지 이상하다.

서스펜스 스릴러를 표방한 영화 ‘하얀 차를 탄 여자’는 도경과 은서가 겪은 사건의 진실을 추적한다. 등장인물들이 각기 다른 증언을 내놓으면서 사건은 거듭 새로운 이야기로 재구성된다. 다친 사람이 피해자인가. 그러면 가해자는 누구인가. 관객의 편견과 판단이 재차 뒤집히면서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 없는 혼란한 상황이 이어진다.

이런 구성을 통해 영화는 가정 내 학대나 데이트 폭력 피해에 노출된 여성들의 결단과 용기, 연대를 점층적으로 그려나간다. 인물의 입으로 감독의 의도를 말하는 설정은 다소 일차원적이나 나름의 투박한 진심이 느껴진다. 억눌렸던 여성들이 끝내 ‘해방’에 이르는 서사는 이들을 응원하던 관객에게도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영화 ‘하얀 차를 탄 여자’의 한 장면. 바이포엠스튜디오 제공

22회 샌디에이고 국제영화제 ‘베스트 인터내셔널 피처’상을 수상하고, 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2관왕에 오른 작품이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2년 2부작 단막극 형태로 14일 만에 촬영을 마쳤는데, 러닝타임 108분의 영화로 재편집돼 3년 반 만인 지난달 29일 마침내 극장에 걸렸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 ‘검사내전’ ‘로스쿨’(이상 JTBC) 등의 조연출과 공동연출을 거친 고혜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고 감독은 “트라우마는 누구에게나 존재한다”며 “나는 트라우마가 오히려 우리를 하나로 묶는 공통분모이자, 서로의 상처를 나눌 용기를 낼 때 비로소 치유될 수 있는 집단적 흉터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15세 이상 관람가.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