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대장’ 카딩턴 선교사, 복음의 땅 다시 밟은 후손들

입력 2025-10-31 12:08 수정 2025-10-31 12:13
카딩턴 선교사 후손들이 지난 26일 전남 순천 금당남부교회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최은수 교수 제공

70여년 전 결핵과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병상 곁을 지키던 한 미국인 의사가 있었다. 한국인들은 그를 ‘거지 대장’ ‘작은 예수’라 불렀다. 광주기독병원을 재건하고 결핵 환자 곁을 지키며 복음을 전한 의료선교사 허버트 카딩턴(1920~2003)의 이야기다.

카딩턴 선교사는 미국 코넬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49년 미국 남장로교 의료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는 간호사인 부인 페이지와 목포에 도착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폐쇄됐던 광주제중병원(광주기독병원 전신)을 재개원하고 25년간 결핵환자를 치료하는데 헌신했다. 그는 이후 1970년대 한국의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하자 한국보다 더 어려운 오지의 환자들을 돌보겠다며 방글라데시로 떠나 25년을 사역했다.

순례 여정을 떠난 후손들

최은수(오른쪽) 교수와 허버트 카딩턴 목사. 최 교수 제공

최근 카딩턴 선교사의 후손 21명이 조부모의 선교지였던 광주·전남 지역을 찾아 사역 현장을 순례했다. 카딩턴 선교사의 후손들은 “한국은 우리 신앙의 고향”이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카딩턴 선교사들의 후손들은 지난 10월 말 광주·전남 일대 6곳의 선교지와 옛 병원 터 등을 방문했다. 카딩턴 선교사 부부가 결핵 환자들에게 치료와 복음을 전하던 현장, 지역 목회자들과 함께 기도하던 교회, 환자들을 집으로 데려와 거처를 마련해주던 장소도 찾았다.

이번 여정을 안내한 최은수 버클리 연합신학대학원(GTU) 연구교수는 31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카딩턴 선교사 후손들의 방한은 목포 파송 76주년, 미 남장로교 전라도 선교 133주년을 맞은 시점에 이뤄진 매우 뜻깊은 여정이었다”며 “전쟁과 가난 속에서 한 알의 밀알처럼 헌신했던 선교사의 흔적을 따라 1대에서 4대에 이르기까지 가족 모두가 세속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예수님 닮은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깊은 감동을 주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전라도 곳곳의 교회와 병원,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 후손들을 마치 친가족처럼 맞이하는 모습을 보며 한국교회의 선교 유산과 믿음의 뿌리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다시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카딩턴 선교사들의 후손들은 지난 10월 말 광주·전남 일대 6곳의 선교지와 옛 병원 터 등을 방문했다. 최은수 교수 제공

“어려운 이를 돕기 위해 하나님은 복 주셔”

허버트 카딩턴 선교사 모습. 국민일보 DB

장남 허버트 카딩턴 목사와 막내 루이스 카딩턴 선교사를 비롯한 후손들은 이번 여정을 전후해 회고문을 남겼다. 그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한다.

허버트 카딩턴 목사는 회고문에서 “아버지의 삶을 바꾼 건 다름 아닌 성경 구절이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이 말씀을 만나고, 그 순간 삶의 방향이 정해졌다”며 운을 뗐다.

허버트 카딩턴 목사는 “한국에서 맡겨진 막대한 필요를 감당하기 위해 무엇보다 아버지는 영적 훈련에 깊이 헌신했다”며 “종종 점심시간에도 병원에 오지 못할 만큼 바빴지만, 병원 언덕 아래 단풍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던 모습을 우리는 기억한다”고 회고했다. 이어 “이러한 영적 습관은 자녀들에게 경건한 모범을 따르고 말씀과 기도의 삶을 살아가도록 깊은 영향을 줬다”고 덧붙였다.

카딩턴 선교사의 열정은 전도 사역으로도 이어졌다. 허버트 카딩턴 목사는 “아버지는 수천 부의 복음서 전도지를 길거리에서 나누었다”며 “시장 상인들이 새벽에 모이면, 병원 회진에 나서기 전 그들에게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전해주곤 했다. 어디를 가든 복음 전도는 아버지의 부르심과 열정이었다”고 전했다.

그는 “아버지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자비(compassion)’”라며 “상처 입은 이들은 자석처럼 아버지에게로 모였다. 병원에서 또는 집에서도 아버지는 늘 그들을 환대하고 돌보셨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부모님이 한국에서 부르심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많은 동역자들의 본, 협력, 교제, 기도 덕분이었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루이스 선교사는 “그 시절 월급을 받으면 아버지는 지폐 뭉치를 반으로 나눴다고 한다”며 “절반은 어머니께 드려 우리가 먹고 살도록 했고, 나머지 절반은 주머니에 넣고 길에서 만나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셨다”고 회고했다. 그는 “아버지의 마음은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 영적으로 잘못된 길을 가는 이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하나님이 주신 자원을 왜 사용하지 않겠는가. 아버지의 논리는 분명했다”고 덧붙였다.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시 113:7) 시편 113편 말씀을 읽을 때마다 카딩턴 선교사를 떠올린다던 루이스 선교사는 “나는 과연 궁핍한 자를 들어 올리고 있는가. 누군가 나를 보고 그것을 지나치게 한다고, 혹은 너무 무모하게 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어쩌면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루이스 선교사는 그러면서 이렇게 글을 마무리했다. “말년에 아버지는 잠시 머뭇거리며 이런 질문을 하셨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많은 복을 주셨을까?’ 그리고 스스로 답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셔서, 우리가 가장 어려운 이들에게 그분의 은혜와 자비를 흘려보내게 하신 것이다.’”

김동규 기자 k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