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삶의 배경을 가진 이들이 단지 K팝이라는 매개체만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이유는, K팝 콘텐츠의 특별한 융합 원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K팝은 마치 비빔밥과 같습니다. 서로 다른 요소들이 각자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함께 어우러져 새로운 결과물이 됩니다.”
그룹 방탄소년단(BTS) 리더 RM(본명 김남준·31)은 29일 경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CEO 서밋에서 ‘APEC 지역의 문화창조산업과 K-컬처의 소프트파워’를 주제로 한 기조 연설에 나서 “K팝은 힙합, 알앤비(R&B), 일렉트로닉댄스뮤직(EDM) 등 서구의 음악 요소를 수용하면서도 한국 고유의 미학, 정서 그리고 제작 시스템을 융합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APEC CEO 서밋은 21개 회원국 정상과 재계 리더가 모여 글로벌 경제 지형을 변화시키는 혁신적 산업과 새로운 트렌드를 논의하는 비즈니스 포럼이다. K팝 가수가 이 행사 연사로 나서는 것은 RM이 최초다.
영어로 연설한 RM은 “K팝은 단순한 음악 장르가 아니라 음악, 춤, 퍼포먼스, 비주얼 스타일, 뮤직비디오, 스토리텔링 콘텐츠, 소셜 미디어 등 전 과정을 아우른 ‘360도 토털 패키지’”라고 강조했다. 이어 “K팝의 성공은 특정 문화의 우월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한국 고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다양성을 존중하고, 세계의 문화를 폭넓게 수용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화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다양한 목소리가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 창조적인 에너지가 폭발한다”고 말했다.
RM은 K팝이 어떻게 국경을 넘어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자기 경험을 들어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10여년 전 방탄소년단이 처음 해외에 진출했을 때만 하더라도 오늘과 같은 영광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며 “당시 방탄소년단의 음악은 자연스럽게 ‘비영어권 문화’로 분류됐고, 우리의 음악으로 주류 방송 플랫폼에 진입하는 것은 마치 ‘한국어 음악이 글로벌 무대에서 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시험대’로까지 느껴졌다. 우리 음악을 알리기 위한 방송국의 문턱은 높고 견고했다”고 돌이켰다.
이어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스스로 기회를 만들기 위해 거리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무료 공연 전단을 직접 나눠주기도 했다”면서 “하지만 더 큰 어려움은 따로 있었다. 우리를 ‘한국 아티스트’라고 소개하면 음악 이야기가 아닌 뜬금없는 질문을 받곤 했다. ‘북한에서 왔어요, 남한에서 왔어요?’ ‘한국이 어디 있는 나라죠?’라는 게 당시 우리가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다. 우리 음악보다 한국이라는 나라의 위치부터 설명해야 했던 정말 냉정한 현실이었다”고 돌아봤다.
RM은 “이 거대한 장벽을 무너뜨린 핵심 동력은 바로 ‘아미’(BTS 팬덤명)였다”며 “이들은 우리의 음악을 매개체로 삼아 국경과 언어를 초월한 소통을 이어갔다. 방탄소년단의 음악이 담은 메시지에 영감을 받아 때로는 자발적인 기부를 진행했고, 때로는 사회적 캠페인을 진행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아시아의 소수문화 지지자’로 여겨진 아미가 새로운 공동체이자 팬덤 문화로서 글로벌 문화 시장에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이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이들은 순수한 문화적 연대의 힘으로 국경을 초월한 긍정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아미의 ‘국경 없는 포용성’과 ‘강력한 연대’는 제게 끊임없는 창의성의 영감이 된다”고 했다.
RM은 “문화란 막힘없이 흘러서 어딘가에 전달되고, 때로는 조화롭게 합쳐져서 K팝처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문화의 창조적 흐름이 전 세계 곳곳에서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가장 역동적인 문화적 다양성을 가진 지역”이라고 말했다.
이어 행사에 참석한 글로벌 재계 리더를 향해 “전 세계의 창작자들이 그들의 창의성을 꽃피울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해 달라. 재능을 펼칠 기회의 장을 만들어 달라”며 “문화와 예술은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동인이자, 다양성과 포용성을 가장 쉽고 빠르게 전달하는 매개체”라고 당부했다.
RM은 이날 오전 APEC CEO 서밋 개회식에도 방시혁 하이브 의장과 함께 참석했다. RM과 방 의장은 개회식 이후 행사장에 마련된 하이브 홍보 부스를 관람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