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무가 사후 현대무용단의 딜레마.... 피나 바우쉬 ‘카네이션’ 내한공연

입력 2025-10-29 05:00
현대무용의 거장 피나 바우쉬의 ‘카네이션’. (c)Oliver Look

LG아트센터는 올해 25주년을 기념해 2000년 개관 당시 선보였던 현대무용의 거장 피나 바우쉬의 ‘카네이션’을 다시 선보인다. 11월 6~9일 LG아트센터 서울, 11월 14~15일 세종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되는 ‘카네이션’은 1982년 초연된 작품으로 바우쉬가 개척한 탄츠테아터(Tanztheater)의 정수를 보여주는 초기 대표작이다. 카네이션 9000송이로 뒤덮인 무대가 관객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남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탄츠테아터는 추상적 속성을 가진 춤(Tanz)과 서사적인 속성을 가진 연극(Theater)을 결합했다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바우쉬가 1973년 독일 부퍼탈 시립극장 발레단 예술감독으로 취임하며 시작됐다. 무용, 연극, 음악, 무대미술, 일상의 몸짓을 결합한 새로운 형식을 제시한 바우쉬는 극장에 요청해 단체명도 ‘탄츠테아터 부퍼탈’로 바꿨다. 36년간 총 44편의 작품을 발표한 바우쉬의 탄츠테아터는 무용을 넘어 현대 공연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바우쉬의 이런 업적을 기려 무용단은 1990년대부터 ‘탄츠테아터 부퍼탈 피나 바우쉬’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바우쉬는 한국에도 팬이 많다. LG아트센터가 개관 이후 꾸준히 그의 작품을 공연한 것이 큰 역할을 했다. ‘카네이션’ 외에 ‘마주르카 포고’ ‘러프 컷’ ‘네페스’ 등 8편이 소개됐다. 특히 ‘러프 컷’은 국가/도시 시리즈 가운데 LG아트센터의 위촉으로 만든 한국 소재 작품이다.

생전의 피나 바우쉬. (c)LG아트센터

그런데, 바우쉬는 지난 2009년 6월 암 진단을 받은 직후 손쓸 틈도 없이 며칠만에 세상을 떴다. 바우쉬의 신작은 더 나올 수 없게 됐지만, 이미 향후 몇 년간의 투어 일정이 잡혀 있던 탄츠테아터 부퍼탈은 예정대로 공연했다. 한국에서도 LG아트센터는 바우쉬 사후 2010년 ‘카페 뮐러’ ‘봄의 제전’, 2014년 ‘풀문’, 2017년 ‘스위트 맘보’를 올렸다.

바우쉬는 모든 것을 혼자서 구성하고 무용수들에게 일일이 지시하는 대신 무용수들과의 대화에서 나오는 경험과 관점을 작품에 수용하는 안무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바우쉬의 타계 이후에도 각각의 작품에 출연했던 고참 무용수들이 주축이 되어 변형 없이 원래대로 재현할 수 있었다. 다만 고참 무용수들이 나이를 먹어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되면서 점차 젊은 무용수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바우쉬 별세로부터 16년이 지난 올해 한국에 오는 ‘카네이션’은 무용수 19명 가운데 2명을 제외하고 모두 근래 입단한 젊은 무용수들이다. 물론 바우쉬와 작업했던 무용수 출신 리허설 디렉터 2명이 작품의 충실한 재연에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무용수의 경험이 중요한 바우쉬의 안무를 고려할 때 이번 ‘카네이션’은 동시대성이 사라진 아카이브(기록 보관)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시간이 좀 더 흘러 바우쉬와 작업했던 무용수가 사라질수록 자칫 박물관의 유물처럼 느껴질 수 있다.

피나 바우쉬가 LG아트센터의 위촉을 받아 한국 소재로 만든 국가/도시 시리즈 ‘러프 컷’. (c)LG아트센터

발레가 보편적인 테크닉을 기반으로 하는 만큼 발레단 안에서 작품 보존이 전통으로 자리잡은 데 비해 1인 안무가 중심의 무용단이 대부분인 현대무용은 안무가 사후 작품 보존이 쉽지 않다. 초창기 현대무용 안무가들의 무용단은 안무가 타계와 함께 해체됐으며 작품 역시 대부분 사라졌다. 무용의 특성상 동작을 기술적으로 온전히 보존하기 어려운 것과 함께 안무가들이 사후에 자신의 무용단이 더 이상 유지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정 문제 등 현실적으로 무용단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이 되면 동작을 보존하는 영상 기술의 발전과 함께 춤의 지식과 보존에 대한 안무가의 관점도 달라졌다. 또한, 안무가들의 작품을 예술적 유산, 즉 공공재로 보는 사회적 분위기도 만들어졌다. 다만 안무가 사후에도 현대무용단이 존속하려면 다른 안무가들의 작품도 공연하는 레퍼토리 컴퍼니로 바뀌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다. 공적 지원을 받는 것은 물론 관객 유지를 위해서다. 마사 그레이엄 무용단, 폴 테일러 무용단, 앨빈 에일리 무용단 등 안무가 사후에도 존속되는 현대무용단들은 레퍼토리 컴퍼니로 바뀌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현대무용의 거장 피나 바우쉬의 ‘카네이션’. (c)Evangelos Rodoulis

‘포스트모던 댄스의 아버지’ 머스 커닝햄은 생전에 자신의 춤 보존 전략을 짰다. 머스 커닝햄 댄스 컴퍼니(MCDC)는 2009년 커닝햄 타계 이후 2년간 ‘마지막 투어’를 돈 뒤 해체됐다. 머스 커닝햄 재단 역시 없어졌지만, 커닝햄의 모든 작품에 대한 저작권을 관리하는 트러스트가 만들어졌다. 재단은 무용수들에게 커닝햄 메소드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작품에 대한 커닝햄의 각종 자료를 모아 재연을 돕도록 했다.

이와 비교해 탄츠테아터 부퍼탈은 바우쉬의 급작스러운 죽음 이후 무용단의 방향성 재정립 과정에 적지 않은 혼란을 겪었다. 바우쉬의 유산을 이어가면서 동시대 안무가들의 신작을 선보이는 레퍼토리 무용단으로의 변화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탄츠테아터 부퍼탈이 바우쉬 사후 소품 아닌 전막을 선보인 것도 9년 만일 정도였다. 최근 그만둔 보리스 샤르마츠를 비롯해 바우쉬 사후 임명된 예술감독들 대부분이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그만둔 것은 탄츠테아터 부퍼탈이 아직 과도기에 있음을 반증한다. 이번 내한공연에는 예술감독 대행을 맡고 있는 다니엘 지크하우스가 함께한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