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 온 그대 손 놓쳤다” 담장 너머 핀 ‘참회와 희망’

입력 2025-10-24 17:43 수정 2025-10-26 15:57
수용자 손지수 씨의 시화 작품 '마중'이 전시된 모습.

반짝거리는 짙은 녹음을 마중하던
분홍의 꽃잎을 놓쳤다 색색의 곱던 단풍잎을
마중하던 짙은 녹음의 잎을 놓쳤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눈꽃을 마중하던 곱디곱던
단풍잎을 놓쳤다 내 손, 마중하는…
어여쁜 그대 손
내가 당신의 사계절이 되어
다시 마중하는 그대 손
놓치지 않겠다

청주교도소 재소자 손지수(가명)씨의 시 ‘마중’에는 마중 온 줄 모르고 놓친 손을 다시 잡고 싶다는 소망이 담겼다. 손씨의 시처럼 교도소 담장 안에서 온 고백과 다짐들은 이곳에서 그림과 글씨를 입고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왔다.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한국교정시화전이 23일 대전 서구 대전광역시청 1층 전시실에서 ‘희망의 빛, 희망의 여정’을 주제로 나흘 간 열린다.

최완성 화백이 개막식에서 '희망의 빛, 희망의 여정'을 주제로 캘리그래피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법무부 교정위원인 박봉열 에덴중앙감리교회 목사는 이날 행사장에서 국민일보와 만나 “수용자들이 시 한 편을 완성하려 수십 번을 고치고 또 고쳐 쓴다”며 “그 참회의 과정에서 시의 내용이 자신의 가슴에 새겨진다”고 말했다. 박 목사는 이처럼 재소자들이 시를 쓰는 것을 두고 “자기 자신에게 하는 가장 훌륭한 설교”라고 설명했다. 한국교정시문학회(회장 장병진 목사)가 주최한 이번 전시에는 나태주 시인과 수용자 손지수 씨 등의 시 36편, 무기수 ‘구원해’ 씨의 그림 2편, 그리고 외부 작가 초청 그림 4편 등 총 40여 편의 작품이 걸렸다.

어머니의 기도, 참회의 그림

작품들의 세계 뒤에는 담장 안팎의 절박한 사연들이 얽혀 있었다. ‘마중’을 비롯한 30여편의 시화는 모두 최완성 화백과 김종익 구세군제원영문 사관이 원작 시에 글씨를 쓰고 그림을 더해 완성했다. 최 화백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임했다. 그는 시 ‘마중’을 두고 “시 속의 ‘눈꽃’은 겨울 눈꽃이 아니라 마주하는 눈빛을 말하는 것이라고 느꼈다”이라며 “그 마음과 소통하려 했다”고 전했다.

왼쪽 사진부터 박봉열 목사의 시화 '어머니의 눈물'과 수용자 유진우 씨의 시화 '미역국'


담장 밖에서 수용자들을 바라보는 이의 시선도 있었다. 박 목사는 교도소 면회실에서 마주한 얼굴들을 떠올리며 ‘어머니의 눈물’이라는 시를 썼다. 그는 “교도소에 가보면 눈가에 주름이 깊게 팬 어머니들이 그렇게 많다”며 “종교를 떠나, 아들이 그 안에 있으면 어머니의 삶 자체가, 그 눈물 자체가 용서와 회복을 구하는 기도”라고 말했다.

담장 안의 묵묵한 참회도 있었다. 전시장 한쪽에는 ‘구원해’라는 가명의 작가가 직접 그린 ‘꿈을 낚는다’와 ‘비갠 하늘 아래’ 등 두 점의 그림이 걸렸다. ‘구원해’는 공주교도소에 복역 중인 무기수 A씨의 가명이다. 교정시문학회 사무총장인 김 사관은 “지금은 기독교 예배 반장으로 성가대로 섬기며 완전히 참회하는 삶을 살고 있다”며 “시를 쓰지 못하는 그에게 시화전 참여를 위해 그림을 부탁했다”고 덧붙였다.

“마음 변해야 생활도 변해”

30여 년간 교정 사역을 해 온 한국교정시문학회장 장병진 목사는 “재소자들이 시를 읽고 쓰면서 마음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를 겪는다”며 “마음이 변해야 생활이 변한다. 이런 활동으로 모범수가 나와야 사회도 건강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한국교정시화전' 개막식 참석자들이 '희망의 빛, 희망의 여정'이라고 쓰인 현수막을 들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날 개막식에는 한국교정시문학회 이사장 김성기 목사(대전 세계로교회)의 초청으로 방한한 에티오피아 교정 공무원 대표단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메브라트 메코넨 칼린티 여자 교도소 부소장은 축사에서 “한국전쟁 참전의 인연이 있는 한국에서 신앙을 바탕으로 한 교정사역을 배우게 되어 기쁘다”며 “이런 문화 교류를 현지에도 적용하고 싶다”고 말했다.

행사는 공주·대전교도소 등에서 연주 봉사를 해 온 ‘주사랑 오카리나’ 팀의 축하 연주에 이어 특별한 커팅식으로 이어졌다. 오색 테이프 대신, ‘죄의 절벽과 모든 질곡을 찢어낸다’는 의미를 담아 긴 ‘화선지’를 참석자들이 함께 손으로 찢어내는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전시는 대전시청 1층에서 26일까지 이어진다.

대전=글·사진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