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대 종이에 눌러쓴 ‘믿음’… 北 지하교인 ‘손글씨 성경’ 첫 공개

입력 2025-10-22 13:01 수정 2025-10-22 13:04
2025 서울 북한인권세계대회 특별 전시장에 전시된 북한 지하교인 성경 필사본 조각들.

작고 누렇게 바랜 종이 위, 희미하지만 정성스러운 손글씨가 성경 구절을 담고 있다. 모서리는 해지고 군데군데 얼룩이 졌지만 한 글자 한 글자 눌러쓴 흔적에서 80년 억압 속에서도 명맥을 이어온 신앙의 간절함이 엿보인다. 북한 지하교인들이 비밀리에 필사해 돌려봤다는 ‘손글씨 성경’ 원본 조각들이 22일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됐다. 이날 서울 더플라자호텔에서 개막한 ‘2025 서울 북한인권세계대회’ 특별 전시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자료들을 세상에 내놓은 이는 이번 대회 조직위원장인 임창호 고신대 교수다. 그는 2007년 북한을 인도적 지원 차원에서 오랫동안 방문했던 한 해외 교포 인사로부터 이 필사본 조각 18점을 건네받았다고 했다. 임 위원장에 따르면, 이 교포는 북한 당국의 신뢰를 얻어 활동하던 중 함경북도 지역에 거주하던 지하교회 지도자와 비밀리에 접촉할 기회를 가졌다.

임창호 2025 서울 북한인권세계대회 조직위원장이 22일 서울 더플라자호텔 전시장에서 북한 지하교인이 쓴 성경 필사본 조각 중 하나를 직접 들고 설명하고 있다.

임 위원장은 이날 국민일보와 인터뷰에서 “북한에서는 성경 소지만으로도 정치범이 될 수 있어 인쇄된 성경을 가질 수 없다”며 “이 교포 인사가 여러 차례 위험을 무릅쓰고 지하교회 지도자를 만나 필사본 조각들을 조금씩 외부로 가지고 나올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지하교인들은 발각될 위험 속에서 성경을 손으로 베껴 작은 종이에 적어 숨겨 다니다가, 자기들끼리 모이면 서로 교환하며 읽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지하교인들의 절박한 공동체 유지 방식을 전하며 “어느 지역 총각과 어느 지역 처녀가 신앙인이라는 정보만 있으면 얼굴도 보지 않고 결혼시키기도 한다더라. 나이 정도만 맞으면 오직 기독교 신앙 하나만 가지고 그렇게 가정을 이루고 공동체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라고 전했다.

2025 서울 북한인권세계대회 특별 전시장에 전시된 북한 지하교인 성경 필사본 조각들.

필사본들은 북한 지하교회 신앙의 역사성 증명하는 사료로 주목받는다. 일부 조각은 북한에서 펄프 대신 사용하는 ‘옥수수대 종이’에 쓰여 북한 내부 제작 사실을 뒷받침한다. 임 위원장은 직접 한 조각을 들어 보이며 “북한 교과서 중에도 이런 종이로 만든 것이 있다. 남한에서는 상상도 못 할 재질”이라며 “이것이 북한에서 만들어졌다는 확실한 증거”라고 말했다.

2025 서울 북한인권세계대회 특별 전시장에 전시된 북한 지하교인 성경 필사본 조각들.

또한 필사본에는 ‘하나님’을 ‘하ᄂᆞ님’으로 표기하거나 ‘~있을지어다’를 ‘~있을지여다’로 적는 등 1956년 성경 개역 한글판 이전, 혹은 1933년 한글맞춤법 통일안 이전 표기들이 발견된다. 임 위원장은 “해방 전후 보급된 오래된 성경이 외부와 단절된 북한 내에서 계속 필사되며 신앙이 이어져 왔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필사본에는 성경(디도서 등)뿐 아니라 찬송가 가사, 교독문 등도 포함돼 있어 지하교인들의 예배 형태를 짐작게 한다.

임 위원장은 필사본을 조심스럽게 다루며 “접혀서 글씨가 뭉개진 것을 직접 다리미질해서 펼쳤다. 박물관에 가야 할 귀한 자료인데 마땅한 곳이 없어 보관만 해오다 이번 대회를 통해 처음 공개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손글씨 성경 조각들은 북한 주민들의 꺼지지 않는 자유와 신앙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덧붙였다.

글·사진=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