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전에 심은 쪽파, 많이 올라왔죠? 두 달쯤 키워서 겨울 김장할 때 쓸 거에요.”
지난 18일,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에 거주하는 우해련(73)씨는 우비를 입고 마당 텃밭을 손질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날 제주에는 오전부터 부슬비가 내렸다. 우씨는 “비가 와서 흙이 부드러워 작업하기 좋다”며 “땅을 잘 골라두었다가 다음 주쯤 시금치를 심을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우씨의 텃밭은 15㎡(4.5평) 정도다. 매년 상추·대파·고추·가지·부추·깻잎 등을 심는다. 지대가 높은 탓에 4월이 돼야 오일장에서 이런저런 모종을 사와 심는다. 올여름에는 호랑이콩과 호박·오이도 재배했다.
여러 작물을 심어도 특히 유용하고 고마운 것들이 있다. 부추는 한 번 심어두면 계속 잘라 먹을 수 있다. 쌈채소와 고추처럼 자주 먹는 채소는 그때그때 따서 밥상에 올린다. 늦가을에 무와 배추를 심어두면 겨우내 된장국을 끓여 먹는다.
우씨는 “여름에 잡초를 뽑는 게 힘들긴 하지만 농약 안 쓴 채소를 먹을 수 있고 식비도 줄일 수 있다”며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일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말했다.
제주의 텃밭, 우영팟
제주 사람들은 집 가까운 곳에 텃밭을 두고 사계절 내내 간단한 식재료를 자급해왔다. 제주에서는 이 텃밭을 ‘우영팟’이라고 부른다.
제주에 텃밭 문화가 활발히 자리잡은 데는 지역적 특성이 크게 작용했다. 척박한 토양에서는 기껏해야 조·메밀·보리 등 잡곡 농사가 주를 이루었고, 섬이라 농산물 유통도 활발하지 않았다.
바다가 있어 전복·미역·감태 등 해산물을 채취해 생계를 유지했지만, 밭일과 바닷일을 병행해야 했기에 늘 바쁜 삶이었다. 자연히 식재료를 직접 키우는 문화가 뿌리내렸다. 다행히 겨울이 온화해 사계절 채소 재배가 가능했다.
바쁜 제주 사람들은 밭에서 딴 채소에 젓갈을 올려 쌈을 싸먹거나, 된장에 배추나 무를 넣고 끓여 후루룩 말아 먹고 서둘러 일터로 향했다. 방게를 이용한 깅이콩조림, 마늘지, 여름철 물회, 겨울 배추콩국 등 제주의 밥상은 우영팟에서 난 ‘땅 것’과 바다에서 얻은 ‘물 것’으로 간단하게 차려졌다.
돼지를 이용한 자급 순환 구조
과거 제주 사람들은 집에 텃밭을 두고 돼지를 함께 키웠다. 돼지우리는 변소 옆에 두고 인분을 사료로 썼다. 돼지의 배설물은 보릿짚·해조류 등과 섞어 퇴비로 만들었다. 돼지 거름은 냄새가 덜하고 발효가 잘 돼 토양에 영양을 공급하는데 효과적이었다.
1937년 제주도청에서 발간한 ‘제주도세요람(濟州島勢要覽)’에 따르면, 당시 제주도 4만7682가구(외국인 제외) 중 97%가 돼지를 키웠다. 돼지는 일상에서 거름으로 활용됐을 뿐 아니라, 경조사 때는 돔베고기(도마 위에 썰어낸 제주식 수육)로 제공되는 등 다방면에서 유용한 자원으로 쓰였다.
제주의 전통 농가 구조를 살펴보면, 돼지우리와 연결된 재래식 화장실인 ‘통시’는 주거 공간인 안거리와 일정 거리를 두고 설치된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 텃밭은 생활 동선상 가장 접근이 용이한 위치에 조성해 일상적인 농사와 식생활을 효율적으로 이어갔다.
실용 만점 우영팟 문화
19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돼지우리는 대부분 사라졌지만, 우영팟 문화는 여전히 실용적인 삶의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2024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제주도는 전체 가구의 48.1%가 마당을 갖춘 단독주택에 거주하고 있다. 이는 전국 평균을 크게 웃도는 수치로, 제주지역의 독특한 주거 문화와 생활 방식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된다.
제주에 저층주택이 많은 것은 도농복합도시로서 주거 공간 내에 농업과 연계된 생활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거 형태는 텃밭을 조성하고 활용하는 데 물리적·문화적 기반이 된다.
제주로 이주한 외지인들 사이에서도 자연친화적인 삶을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일부 고급 타운하우스 단지에서는 세대별로 소규모 텃밭을 제공하는 등 제주 고유의 우영팟 문화가 현대 주거 형태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계승되고 있다.
우영팟은 제주 전통 생활 방식 가운데 가장 실용적이고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형태다. 쌈채소는 한 달, 감자도 세 달이면 수확이 가능해 관리 부담이 적다. 농약과 화학비료로 키워진 영양과잉 채소가 아니라, 알맞게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자란 건강한 채소는 본래의 풍부한 맛을 지니고 있어 먹는 즐거움도 크다.
그래서인지 제주에는 오래 사는 노인이 많다. 제주의 장수 문화는 옛 문헌에서도 확인된다. 조선시대 제주목사 이형상이 저술한 ‘남환박물’에는 “‘지지(地誌·제주도 지방지)에 제주도는 병이 적어서 일찍 죽는 사람이 없고, 나이가 80~90세에 이르는 자가 많다’는 내용이 있어 이 지방 사람에게 물으니, 옛날에는 120세의 사람도 많았다’는 말을 들었다”는 내용이 있다.
노인 잔치에 참석한 인원에 대한 기록도 눈길을 끈다. 이형상은 “102세가 1인, 101세 2인, 90세 이상 29인, 80세 이상 211인이었으며, 이들 대부분이 근력이 장건해 기세가 꺾이거나 무너지는 모습이 거의 없었다”고 적었다.
이러한 기록은 제주가 과거부터 건강한 자연환경과 생활 방식 속에서 장수 문화를 형성해왔음을 보여준다. 제주는 지금도 전남 등과 함께 전국에서 100세 이상 노인이 가장 많은 지역으로 분류된다.
우영팟은 단순히 채소류만 재배하는 공간은 아니었다. 제수 과일을 위한 귤나무, 전통 의복인 갈옷을 만들기 위한 감나무, 죽제품 제작을 위한 대나무 등 다양한 식물이 함께 심어졌다.
이 외에도 구근류를 재배하거나 저장하고, 모종을 기르는 공간으로도 활용되며 자급자족형 농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제주 사람들은 “우영팟에서 힘을 기른다”고 표현하며 그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제주도에서는 집집마다 어떤 형식으로든 우영팟을 갖추고 있다. 조금만 노력하면 신선한 로컬푸드를 집 마당에서 구할 수 있다. 우영팟에서 돌을 골라내며 마음을 다스리고, 직접 키운 채소를 식탁에 올리는 과정은 건강과 만족감을 동시에 제공한다. 마트에 가지 않아도 몇 끼 식사가 가능한 이유, 우영팟은 제주 생활의 여유와 자급자족의 철학을 담은 진정한 ‘핫스팟’으로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이 기사는 제주특별자치도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