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살아야 도시 산다” 경영전문가가 테헤란로 한복판에 세운 이곳

입력 2025-10-21 06:05 수정 2025-10-21 10:22
선릉역 북카페 ‘북세쯔’ 대표 이승한(오른쪽) 회장과 엄정희 교수 부부

기업의 빌딩들이 숲을 이룬 서울 강남 테헤란로(선릉역 인근). ‘테헤란밸리’라는 별명답게 첨단 산업과 자본의 상징인 이 거리는 차가운 유리와 콘크리트로 빚어진 회색 도시 속, 사원증을 목에 건 직장인들의 분주한 발걸음으로 가득하다. 빽빽한 빌딩숲 사이에 잠시 숨을 고르고 마음을 쉬게 하는 공간이 있다. 바로 서점, 카페, 공연·강연장을 합친 복합문화공간 ‘북쌔즈’다.

‘북쌔즈’에 들어서면 먼저 향긋한 커피 내음이 감도는 카페 공간이 눈에 들어오지만, 고개를 돌리면 오른쪽 벽면과 2층 서가를 가득 채운 책들이 마치 도서관에 온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이곳이 ‘북카페’임을 실감케 한다.

이곳은 전 홈플러스 회장이자, 현 N&P(Next & Partners) 그룹 이승한(79) 회장과 그의 아내 엄정희(75) 서울사이버대 가족상담학과 교수가 교수가 함께 만든 공간이다. N&P그룹은 경영 연구를 담당하는 EoM경영연구원, 가족 멘토링 사업을 운영하는 UFCi연합가족상담연구소 그리고 2018년 6월 문을 연 복합문화공간 ‘북쎄즈’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 두 사람을 ‘북쌔즈’에서 만났다. 한때 대형 맥주집이었으나 장사가 부진해 영업을 중단했고 건물주가 식당으로 바꾸려던 이곳을 이 회장이 설득해 직접 매입했다. 부부가 이 공간을 새롭게 단장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골목이 살아야 도시가 살아나

이 회장은 삼성그룹 비서실에서 신경영추진팀장 부사장으로 재직하며 이건희 회장을 보좌, 삼성이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후 1997년 삼성물산 유통부문 대표이사를 거쳐 홈플러스 창립 CEO로서 10년 만에 매출 12조원대의 선도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4년 홈플러스 회장직에서 물러난 뒤 몇 년이 지나 본사가 다른 곳으로 이전했지만, 그는 여전히 선릉역 인근을 떠나지 않고 있다.

이 회장은 “이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의 인생’을 살았다면, 이제는 남은 시간을 ‘의미 있는 인생’으로 채우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골목이 곧 삶의 질이고 골목이 살아야 도시가 살아난다’는 생각에 2018년 ‘북쌔즈’를 열게 됐다”고 말했다.

‘도시의 경쟁력은 살기 좋은 골목길, 살기 좋은 동네에서 나온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이 회장은 “선진국을 만들려면 이런 문화적 공간이 골목 곳곳에 자리해야 한다”며 “이런 공간이 주민들에게는 배움터이자 쉼터가 되어 지역 문화를 풍성하게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처음 ‘북쌔즈’ 복합문화공간을 찾은 이들은 “우리 동네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하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곳은 아침이면 인문학과 철학을 주제로 한 강의가 열리는 배움의 장이 되고, 점심시간에는 직장인들의 잠시 머무는 쉼터로, 저녁이 되면 책을 읽는 독서모임과 공연이 어우러지는 문화살롱으로 바뀐다.

‘손익 계산’ 따지지 않는 손해보는 리더

배움과 힐링, 문화의 공간 ‘북쎄즈’에서는 금난새 지휘자의 클래식 앙상블, 영국 성악가 폴 포츠의 자선 콘서트, 북쎄즈가 직접 기획한 클래식과 영화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뮤직 콘서트, 그리고 철학·인문학 강사들의 깊이 있는 강연 등 수준 높은 문화 프로그램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세계적인 거장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회장은 “이곳이 바로 ‘작은 예술의전당’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예술의전당 음악 설계팀과 조명 기술자들이 직접 설계를 맡았고, 소리가 퍼지지 않도록 방음과 진동차단에 공을 들였으며, 무대에는 그랜드피아노까지 갖춰 완벽한 공연 환경을 마련했다”고 덧붙였다.

성공한 경영인으로, 또 지난 9월에는 인문과 과학으로 보는 ‘통찰 경영’ 책까지 펴낸 그이지만, ‘북쌔즈’에서만큼은 손해보는 리더로 살아간다.

이 회장은 “빵 하나를 만들 때도 프랑스산 밀가루를 직접 들여온다”며 “비용이 더 들더라도, 설령 적자가 나더라도 가장 정직하고 맛있는 빵을 만들어야 한다고 직원들에게 강조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 손익계산서가 결코 적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경영 용어로는 이를 ‘로슬리드(Loss Lead)’라고 하는데,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그만큼 브랜드 가치가 형성되고 신뢰가 쌓인다는 의미다.

그는 “눈앞의 이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뢰와 진심이며 그것이 결국 가장 큰 자산이자 이익이 된다”고 말했다.

북쌔즈 ‘상담 우체국’ 통해 위로와 격려


‘북쌔즈’에서는 상담도 운영되고 있다. 매장 한편에 마련된 ‘상담우체통’에 고민 편지를 넣으면 서울사이버대 가족상담학과 엄정희 교수가 직접 무료 상담을 진행한다. 1회기부터 5회기까지는 재능기부 형식의 무료 상담으로, 6회기부터는 최소한의 상담료만 받는다.

이화여자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한 엄 교수는 늦은 나이에 다시 학업을 시작해 50대에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서울사이버대 가정상담학 교수로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그는 “우리 가정에는 참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5년만에 주신, 어렵게 얻은 아들을 8살 때 갑작스런 사고로 가슴에 묻는 참척의 고통을 겪었다. 그 충격으로 위암 진단까지 받았다”고 고백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던 순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오늘만이라도 살아보자’는 마음이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건강을 되찾고, 인생의 폭풍 속에서도 우리 가정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 감사가 결국 나눔과 봉사로 이어졌지요. 고통의 시간 속에서 배운 그 은혜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내가 겪은 역경과 회복의 이야기가 다른 가정의 살리고 치유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이라 믿고 무료 상담을 하게 됐습니다.”

삼성 재직 시절, 능력 있는 인재로 소문나 중매 제의가 끊이지 않았던 이 회장은 비서실 선배인 손병두 KBS 이사장의 소개로 엄 교수를 만나 첫눈에 반했다. 꿈 많던 가난한 청년이던 그는 세 번째 데이트 때 ‘변치 말자’는 뜻을 담아 첫 선물로 차돌을 건넸다고 했다.

엄 교수도 호감을 느꼈지만, 국세청장과 삼미그룹 부회장을 지낸 아버지를 둔 집안의 반대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 회장은 특유의 자신감과 진심 어린 정직함으로 결국 마음을 얻었고, 어머니의 허락까지 받아냈다. 두 사람은 9월에 만나 11월에 약혼하고, 이듬해 1월 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을 앞두고 엄 교수는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당신도 사랑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고, 이 회장은 그 약속을 마음에 새겼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는 예배 때마다 앞자리에 앉아 말씀을 듣고 필기를 하더니, 봉사에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결혼 24년 만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됐다.

올해로 결혼 51년 차를 맞은 두 사람. 이 회장은 아내 엄 교수를 ‘오리’라고 부른다. 불만이 있을 때마다 입을 쭉 내미는 모습이 귀여워 붙은 애칭이다. 그는 “젊은 시절엔 서로 바빠 싸울 틈도 없었고, 요즘엔 그냥 말없이 곁에 있어 주면 금세 풀린다”며 웃었다.

엄 교수는 “이곳은 오피스 상권이 많다 보니, 직장인들 중에도 부부 갈등으로 상담소를 찾는 분들이 적지 않다”며 “배우자를 통제하려 하거나, 성격 차이로 인한 갈등이 가장 흔한 고민”이라고 말했다. 이어 “칭찬은 배우자를 변화시키는 가장 따뜻한 언어”라며 “작은 격려 한마디가 관계의 온도를 바꾼다”고 조언했다.

통찰력으로 길을 찾는 ‘통찰 경영’
선릉역 북카페 ‘북세쯔’ 대표 이승한(오른쪽) 회장과 엄정희 교수 부부

이 회장은 지난 9월, 인문학과 과학의 시각으로 경영을 풀어낸 저서 ‘통찰경영’을 출간했다. 평생 경영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실전과 이론을 아우르며 국내외 기업 사례와 경영자들의 통찰과 조언을 함께 담았다.

이 회장은 최근 새 주인을 찾고 있는 ‘홈플러스’ 사태에 대해 “참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10년 만에 매출 12조 원을 달성하고, 경영의 질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과 영국의 다국적 기업들까지 벤치마킹하러 올 정도였다”며 “그런데 기존 리더십이 쌓아온 틀을 모두 무너뜨리고, 새롭게 해보겠다고 방향을 바꿔버린 것이 오늘의 결과로 이어진 듯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통찰경영’에서 강조한 대로 “위기 속에 기회가 있다”며 “가장 어려울 때 가장 큰 혁신이 일어나고, 평온할 때는 결코 혁신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 우리 사회는 위기이자 동시에 거대한 기회의 문 앞에 서 있다. 이 시점에서 어떤 목표를 세우고, 어떤 전략으로 대응하느냐가 관건”이라며 “변화의 흐름 속에서 목표를 설정하고 전략을 수립하는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고자 했다”고 덧붙였다

엄 교수는 “세상의 어둠 속에서도 주님을 만나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며 “‘북쎄즈’가 단순한 문화·힐링·배움의 공간을 넘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장소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우리의 작은 노력이 세상을 밝히는 변화의 씨앗이 되고, 민족과 세상을 치유하는 협력의 공동체로 자라나길 기도한다”며 “이곳이 사람들에게 배움이 되고 쉼이 되며, 위로와 회복이 되는 공간이 되길 소망한다”고 덧붙였다.

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