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가정을 지킨 사람이 불리한 사회, 법은 누구의 편인가

입력 2025-10-20 07:30

송길원 목사
하이패밀리 대표·동서대 석좌교수

최근 대법원은 8년 가까이 이어진 노소영 관장과 최태원 회장 간의 이혼 소송에 최종 판단을 내렸다. 이 사건은 재벌가의 사적 분쟁을 넘어 가정 헌신 법적 정의에 대한 사회적 질문으로 확장되며 국민적 관심과 반응을 이끌어냈다. 특히 ‘가정을 지키고자 한쪽이 법정에서 어떤 위치에 서게 되는가’라는 문제의식이, 조용하지만 강하게 부상했다.

가정은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할 공동체의 최소 단위다. 국가는 혼인과 가족을 존중하고 보호하겠다고 말하지만, 최근 대법원의 판결은 그 원칙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이번 사건은 단지 한 부부의 이혼 소송이 아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버틴 사람’과 ‘먼저 가정을 떠난 사람’ 중 법은 누구에게 손을 들어주는가라는 질문을 우리 사회 전체에 던진 상징적 장면이다.

대법원은 유책배우자가 먼저 제기한 이혼 청구에 사실상 길을 열어주었다. 가정을 파탄 낸 사람이 소송을 통해 주도권을 쥐고, 가정을 붙들고 있던 배우자는 ‘이혼에 협조하지 않는 태도’로 인해 오히려 불리한 위치에 섰다. 이혼을 거부하며 가정을 지키겠다는 의지는 존중되지 않았고, 결국 ‘먼저 떠난 사람이 유리한 구조’가 형성되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제는 끝까지 지키려는 사람보다 먼저 버리는 사람이 더 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사회가 된 것인가.

30년 넘는 혼인 기간 동안 출산, 양육, 가사노동, 정서적 동행으로 지켜온 가정은 법정에서 ‘입증 불가능한 영역’으로 밀려났다. 법원은 “기여가 있다면 구체적으로 증명하라”고 요구했다. 이 대목에서 시민들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30년 헌신한 시간을 숫자로 증명하라니, 사랑으로 했으면 노동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뭐가 있는가.” “이제 며느리 아내 엄마로 살아온 세대는 묻게 된다. 나는 내 노동을 증명할 수 있는가.”

2030세대의 반응은 더욱 노골적이다. “결혼을 왜 하냐는 질문에 이번 판결이 가장 명확한 답을 줬다. 이제 가정은 공동체가 아니라 계약과 자산 구조일 뿐이라는 선언 아닌가.”

사랑과 지지는 계약서에 남지 않고 헌신과 돌봄은 장부로 계산되지 않는다. 그러나 기업의 가치가 성장할 수 있었던 환경, 사회적 신뢰와 심리적 안정이라는 가족 기반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럼에도 법원은 이를 인정하기보다 ‘1% 기여’라는 조롱에 가까운 숫자 논리를 수용했다. 헌신을 증명하라는 말은 곧 ‘당신의 삶을 회계 자료로 제출하라’는 요구와 다르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재산은 철저히 보호하면서도 가정은 보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혼외자 출산, 재산 유출, 친인척으로의 편법 증여 등 가정의 파괴와 관련된 중대한 행위들이 있었음에도, 대법원은 “당시는 이혼 전이었으므로 재산 분할 대상이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소송을 준비하며 재산을 미리 옮겨놓기만 하면 가정을 지키려고 버틴 사람은 결국 빈손으로 쫓겨나도 된다는 논리다. 이것이 정말 법이 말하는 정의인가.

국제 기준은 다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이미 ‘보이지 않는 노동(Invisible Labor)’ 문제를 공식 의제로 다루고 있고, 일본 최고재판소는 가사노동을 재산분할 기여 요소로 폭넓게 인정하기 시작했다. 미국 일부 주에서는 정서적 동반자 역할만으로도 자산 분배를 인정한다. 그러나 한국의 법원은 여전히 ‘가사노동은 당연한 일’이라는 낡은 인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고대 사회도 이러지 않았다. 삶의 지혜서라 불리는 잠언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아내가 손수 거둔 결실은 아내에게 돌려라. 아내가 이룬 공로가 성문 어귀 광장에서 인정받게 하여라.”(잠 31:31)

이번 판결은 하나의 사례가 아니라 국가적 기준의 선언이다. “가정을 지키려 남아 있던 사람보다 먼저 떠난 사람이 법적 우위를 가진다” “재산은 보호하되 공동체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헌신은 증명하지 못하면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 법이 던진 이 메시지는 다음세대의 윤리 기준까지 바꾸게 될 것이다. 누가 이런 구조 속에서 다시 ‘가정을 위해 버티는 역할’을 맡으려 하겠는가.

법은 중립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중립이 강자에게 유리한 구조를 방치한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절차 행정에 불과하다. 재산을 독점한 자는 소송을 견딜 시간과 자원을 갖고 있고 법은 그 인내력에 보상을 지급한다. 가정을 지키며 버틴 시간은 보호받지 못했고 심지어 ‘갈등의 원인’으로 전환되었다.

나는 이 신호에 동의할 수 없다. 법은 최소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 버틴 시간과 헌신으로 쌓여온 삶의 무게를 모욕해서는 안 된다. 자본과 영향력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법 앞에 다시 묻는다. “법은 정말, 누구의 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