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두 아들의 엄마인 유지연(44)씨는 ‘조울병’으로 알려진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다. 이혼 후 이듬해 조증과 우울증이 동시에 나타나며 진단을 받았고,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줘 지난 8월부터 서울 은평구의 지역전환시설인 ‘새오름터’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곳은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정신질환자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전 머물며 일상 회복과 사회 적응 훈련을 통해 자립을 준비하는 복지 기관이다.
지난 17일 서울 은평구 서울시립은혜로운집에서 열린 문화행사 ‘힐링 마인드 공모전, 콘서트’에 참석한 유씨는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새오름터에서 25명과 함께 지내며 변화된 마음을 담은 일상 수기가 ‘나와 당신의 행복 이야기’를 주제로 한 공모전에서 장려상을 받은 것이다. 그는 지난 여름 무더위 속에 활짝 핀 수국을 촬영해 자신의 삶을 빗대며 지난날에 대한 감사와 앞으로의 희망을 짧은 글로 표현했다. 평소와 달리 입술을 붉게 칠하고 행사장을 찾은 유씨는 기자에게 “아들들에게 제일 먼저 알려주고 싶다”고 환하게 웃었다.
유씨에게 성취와 웃음을 안겨준 이번 행사는 은평구 내 사회정신재활시설과 유관기관이 2011년 함께 만든 은평정신건강네트워크(EMS)가 정신건강의 날(10월10일)을 기념해 마련한 자리였다. EMS는 다양한 정신장애인들이 기관을 넘어 서로 소통하고 세상과 연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올해까지 세 번째 행사를 이어오고 있다. 새오름터의 최유진 센터장은 “작년 포럼 형식의 행사에는 전국 정신재활시설, 사회 복지 관계자 등 200여명이 이 온오프라인으로 참여했다”며 “정신 건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을 실감했다”고 했다.
EMS 소속 기관들은 정신질환자들이 지역 사회에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모친과 함께 살던 임미연(59)씨는 지난 3월부터 생활이 어려워질 때마다 새오름터를 찾고 있다. 최근 기자와 만난 그는 “정신병원에 갇혀 있지 않고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어서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그는 이곳에서 아침에 일어나고 약을 꾸준히 먹으며 사회 적응과 복귀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 있다. 임씨는 “정신과 약을 먹으면 잠이 많이 와서 어쩔 땐 하루 20시간을 잘 때도 있다”며 “규칙적으로 자기 할 일을 하면서 지내는 것이 저에겐 의미 있는 삶”이라고 말했다. 이날 오전에도 외부에서 초빙된 운동처방사가 지하 강당에서 입소자들과 함께 스트레칭을 진행했다.
올해 서른 살이 된 신혜인씨는 새오름터에서 취업을 준비 중이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컴퓨터 코딩과 사회복지 등 다양한 진로를 위한 공부도 병행하고 있다. 조현병 진단을 받은 신씨는 “처음엔 이 병에 대해 잘 몰라서 무서운 마음에 외출도 안 했지만, 지금은 약도 꾸준히 먹고 다른 회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음이 많이 평안해졌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크리스천이기도 한 신씨는 어머니가 선물해준 기도문이 담긴 책을 매일 소리 내어 읽고 있다. “예전엔 하나님이 아버지처럼 느껴졌는데, 요즘엔 편안한 친구 같아요. 정신질환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저를 차별하지 않고 무한한 사랑으로 바라봐 주시니까요. 저도 그런 사랑을 실천하며 편견 없이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유씨는 따로 지내는 아이들을 위해 매일 기도한다고 했다. “아이들이 건강히 잘 지내고, 저 때문에 더이상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에게 신앙은 평범한 삶을 꿈꾸게 하는 원동력이자 큰 위로가 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저를 평범한 엄마로 바라봐 주세요. ‘잘 살았구나’ 하면서 매일 저를 격려해 주시기도 해요. 언젠가 아이들하고 다시 만나 당당한 엄마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망합니다.”
조현병을 앓고 있는 임씨는 세상의 편견 속에서 여러 차례 죽음을 결심했던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정신질환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이들과 함께 대화하고 밥도 먹고, 음악도 들으면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고 했다. 이어 “다른 회원들하고 얘기하면서 웃음이 많아졌다”며 “이곳에서 지내는 시간이 어쩌면 제게 복권 같은 기회가 아닐까 싶다”고 덧붙였다. 임씨는 미대 진학을 꿈꿨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유화를 배워서 기회가 닿으면 더 어려운 사람에게 그림을 가르치며 돈을 벌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사진과 그림, 수기 등 회복 의지를 담은 작품 전시회와 시상식 외에도 콘서트를 겸한 이 날 행사에는 정신질환시설 입소자들이 참여했다. 이날 대상은 정신재활시설 ‘해사랑’에서 생활하는 오순민(22)씨가 수상했다. 오씨는 매일 주간재활시설에 도복을 입고 다니며 태권도 사범의 꿈을 키우고 있다. 그는 훈련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나는야 태권V’라는 제목의 사진을 출품했다. 이날 행사장에도 흰색 도복을 입고 참여한 오씨는 ‘요즘 배우는 품새를 보여달라’는 요청에 자랑스럽게 동작을 선보이기도 했다. EMS의 한 관계자는 “청년의 열정에 대상을 주자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모였다”고 귀띔했다.
이날 행사에는 다양한 이들이 따뜻한 손길로 공연을 준비했다. 한국유방암환우회합창단과 구세군 BROS밴드, 거리의 시인의 래퍼 노현태·가수 안율, 기타리스트 윤영두씨가 무대에 올라 참여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재활시설 입소자들도 코믹 춤과 사물놀이 공연을 준비해 관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서울시은평병원 박유미 원장은 “정신 건강은 신체 건강과 마찬가지로 누구든지 누려야 하는 권리”라면서 “혼자가 아니라 함께 노력하면서 채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신은정 기자 se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