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익 재조명’…마부 신화 넘어 한국교회 역사로

입력 2025-10-18 18:23 수정 2025-10-18 23:04
이자익목사기념사업회는 18일 전북 김제 금산교회에서 '이자익 목사, 그 생애를 묻고 답하다' 출판 감사 예배를 드렸다. 왼쪽으로 '기역자형 예배당'과 오른쪽 금산교회 예배당.

부슬비가 종일 내리던 18일 전북 김제 금산교회(김종원 목사) 입구. 빗물을 잔뜩 머금어 고동색을 띤 십자가 종탑이 방문객을 반기고 있었다. 종탑을 마주한 ‘ㄱ(기역)자형 예배당’ 기와 처마 끝에는 빗물이 고여 뚝뚝 떨어졌다.

이날 이자익목사기념사업회(이사장 문성모 목사)는 책 ‘이자익 목사, 그 생애를 묻고 답하다’의 출간을 기념해 감사예배를 드렸다. 책은 문성모 목사가 이자익 목사의 일대기를 문답 형태로 기록한 전기다.
이자익 목사가 금산교회 당회록에 사용한 태극문양 도장. 이자익목사기념사업회 제공

이자익(사진) 목사는 조덕삼 장로의 마부로 일하다가 독립한 후 1902년 최의덕(루이스 테이트) 선교사를 통해 예수를 믿었다. 이후 3년 뒤 조덕삼과 함께 세례를 받기 위한 학습을 받았다. 이것이 금산교회의 시작이었다.

이자익 목사는 장로교 분열 이전 총회장을 세 차례 역임했으며 호주선교회 요청으로 거창지부 순회 목사로 31개 농촌교회를 돌봤다. 75세의 고령에는 대전신학교(현 대전신학대학교)와 대전노회를 신설하는 데에도 이바지했다.

저자인 문 목사는 “한국 교회사 주요인물인 이자익 목사의 업적이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에 대해 오해와 오류가 많다”고 책을 쓰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흔히 알려진 ‘그가 종이었던 시절 상전을 제치고 먼저 장로가 됐다’는 일화는 사실과 다르다. 이자익 목사는 조덕삼 장로의 마부였지만, 마부는 종이 아니라 일정한 급료(새경)를 받는 계약직 노동자였다. 이자익 목사가 장로 임직을 받았던 시기는 1908년으로 이미 마부를 독립해 장사하던 때였다.

이자익 목사의 아버지는 이부일(李富日)이며, 흔히 알려진 ‘이기진’은 아들의 이름이라는 점도 문 목사가 바로잡은 오류 중 하나다.

문성모 목사가 18일 전북 김제 금산교회에서 이자익 목사 전기를 소개하고 있다.

문 목사는 대전신학대 총장 재임 중이던 2004년, 개교 50주년 기념 ‘대전신학대학교 50년사’를 편찬하면서 이자익 목사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후 후손의 증언과 묘비, 일기 등 1차 자료를 바탕으로 이자익 목사에 대한 역사를 다시 정리했다.

책은 ‘이자익 목사는 누구인가’, ‘마부 생활 이후 독립 시기는 언제인가’ 등 오해와 진실을 짚는 질문부터, ‘김제에서 거창 순회 목사로 가게 된 과정과 동기는 무엇인가’, ‘이자익 총회장 이후 장로교단은 어떻게 분열했나’ 등 그의 목회와 사역을 보여주는 40개 질문에 답한다.

남청 배재대 명예교수는 “이자익 목사의 출생부터 임종, 장례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애를 빠짐없이 기록한 책”이라고 평가했다. 남 명예교수는 “이자익 목사의 생애는 한국 개신교 역사의 전반부 70년과 맞물려 있다”며 “한 개인뿐 아니라 한국개신교 초기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사료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문 목사는 이날 금산교회에 창립 120주년을 기념해 책을 헌정했다. 금산교회는 문 목사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김종원 목사는 “이자익 목사 전 생애 발자취를 찾아주시고 이 기록을 헌정해주신 것은 금산교회의 발자취를 이 시대 속에서도 계승하라는 뜻이라 생각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자익 목사님이 사역했던 흔적을 마음에 새겨 우리에게 맡기신 삶과 직분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겠다”고 말했다.

김제=글·사진 박윤서 기자 pyun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