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민주화운동 10여일 후인, 1980년 6월 1일 서울안동교회 주보 한쪽에 인쇄된 문장 위로 검은 펜 선이 그어졌다. “구호헌금: 오늘 예배 시간에 광주 시민들의 구호를 위한 헌금을 함께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선은 내용을 완전히 지우지 않고, 오히려 글씨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망설인 듯한 흔적이었다.
17일 서울 연세대 신학대학원에서 열린 ‘오월 광주, 기억과 무등(無等)의 신학’ 콘퍼런스는 이 ‘주저흔’이 남긴 질문에서 시작됐다.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5·18 민주화운동이지만, 정작 현장에 있었던 한국 개신교의 공식 기록은 찾아보기 힘든 현실을 되짚어보는 자리였다.
최상도 전 호남신대 교수(현 예장통합 사무총장)는 이 주보를 스크린에 띄우며 “이 흔적은 단순한 검열이 아니라, 후대의 사람들이 알아봐 주길 바랐던 주저흔, 즉 망설임의 흔적”이라며 “시대의 압박에 못 이겨 지우면서도, 차마 진실마저 지울 수는 없었던 당시 교회의 고뇌가 담긴 최소한의 저항”이라고 말했다.
지난 45년간 교회의 공식적인 기억은 하나로 모아지지 못한 채 개인의 증언이나 흩어진 자료들로만 남았다. 이러한 기록 부재의 배경에는 깊은 상처, 즉 트라우마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박신향 호남신대 교수는 “트라우마는 세상이 강요하는 침묵과, 고통이 너무 커 말할 수 없는 내면의 침묵이라는 ‘이중의 침묵’에 사람을 가둔다”라며 “이 아픔이 교회의 공식적인 기록과 증언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벽으로 작동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말하지 못하는 고통을 신학의 언어로 풀어내려는 시도가 바로 박용범 호남신대 교수의 ‘무등(無等)신학’이다. 대전 출신인 박 교수는 2015년 광주에 처음 부임했을 때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신학의 출발점을 설명했다. 그는 “한 권사님이 ‘5·18 때 전남대 학생이었는데, 쇠몽둥이로 맞아 생긴 상처’라며 머리의 흉터를 보여주셨다”라며 “그때 처음으로 광주의 아픔을 책이 아닌 살아있는 현실로 마주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사전적으로 ‘등급이 없음’을 뜻하는 ‘무등’이라는 단어에서 광주의 정신을 발견했다. 그는 “‘무등’은 광주의 상징인 무등산의 이름이자, 5·18 당시 시민들이 계급과 신분을 넘어 주먹밥을 나누며 형성했던 평등 공동체의 정신을 담고 있다”면서 “이는 자기를 낮춰 이웃을 섬기는 기독교 정신과 맞닿아 있으며, 5·18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발견하고 미래를 위한 유산으로 기록하려는 신학적 노력”이라고 설명했다.
부족한 연구 환경 속에서도 교회가 침묵만 한 것은 아니었다. 최 전 교수는 국내외에서 이어진 교회의 대응을 소개했다. 그는 국내의 저항에 대해 “1980년 5월 25일, 목포 지역 교회들은 연합 기도회를 열고 광주를 ‘시민혁명’으로 명명한 최초의 기독교 성명서를 발표했다”며 “이는 당시 군부가 ‘폭동’으로 규정한 것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인식을 보여준 중요한 기록”이라고 설명했다.
나아가 “군부의 봉쇄 속에서 해외 선교사와 일본 기독교 네트워크를 통해 광주의 소식이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전달됐고, WCC는 당시 상황을 ‘학살(massacre)’로 규정하며 전 세계에 알렸다”고 발표했다. 또한 “5·18 묘역 희생자 중 종교가 표기된 193기 가운데 개신교인이 129기로 가장 많다는 사실은, 개인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의 깊은 참여를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결국 현장 연구는 단순한 역사 복원을 넘어 공동체의 치유와도 연결된다. 박신향 교수는 회복의 과정을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딛고 이전보다 더 단단하게 성장하는 ‘외상 후 성장’”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를 위해 ‘안전한 곳에서 아픔을 인정하고, 기억을 꺼내 충분히 슬퍼하며, 다시 공동체와 손을 잡는’ 3단계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 과제의 시급성에 대해 최 전 교수는 “시간이 더 흐르면 당시를 증언할 분들의 구술 기록마저 영영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40주년을 앞두고 우연히 발견했던 이 주보 한 장이 잊혔던 교회의 5·18 역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된 계기였다고 덧붙였다.
글·사진=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