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에서 30년 넘게 간판 아나운서로 일하며 직장생활을 마무리했다. 아들은 성실히 자라 제때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남부럽지 않은 평탄한 삶을 살아온 듯하지만, 김재원 아나운서는 굴곡진 인생을 헤쳐왔다. 13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취업 등 미래를 꿈꾸려던 때엔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병간호해야 했다. 최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스튜디오에서 만난 김 아나운서는 “그런 시절마다 필요한 만큼을 채워준 손길이 내 곁에 있었다”며 “100명의 1%의 헌신으로 내 인생이 굴러왔다”며 환하게 웃었다.
김 아나운서는 지난 7월 말 정년퇴임을 1년여 앞두고 KBS에서 명예퇴직했다. 조금 이른 결정이었지만, 그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낯선 세상에 도전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다시 취준생이 된 느낌, 와이파이 없이 여행지에 놓인 기분”이라고 했다. 요즘 그는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고 있다. 10월 말 기독교 방송 CGNTV에서 새롭게 개편된 간증 프로그램 진행을 맡았으며, 스피치 강연 등 프리랜서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김 아나운서는 “KBS라는 학교를 시청자 장학금으로 다닌 것이나 다름없다”며 지난 세월에 대한 깊은 감사를 전했다. 특히 12년 동안 진행한 아침 간판 프로그램 ‘아침마당’을 통해 만난 수많은 사람을 ‘과외 선생님’이라고 표현했다. “방송국까지 찾아와 저에게 인생 레슨을 주고 가신 분들이잖아요.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소중한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방송 일을 하면서 제가 받은 가장 큰 축복입니다.”
김 아나운서는 일하면서 만나는 이들에게 그런 고마운 마음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방송에 출연한 일반인들에게 작게나마 마음을 표현한 일들이 그랬다. “식사하시라”며 그가 건넨 봉투를 받은 출연자들은 작가들에게 그 선행을 알렸다. 아이 12명을 낳아 기르는 엄마, 청년들에게 저렴하게 식사를 나누는 식당 사장님, 아픈 아버지와 함께 출연한 아들 등이 김 아나운서의 마음을 전해 받았다. “그분들을 돕겠다는 거창한 목적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간식 한 번, 밥 한 끼라도 한번 사고 싶었던 거지요. 그런 마음을 담아 얇은 봉투를 건넸을 뿐이에요.”
30년간의 직장 생활이 늘 꽃길이었을 리는 없다. 그 역시 다른 직장인과 마찬가지로 힘든 순간을 겪었다. 아무런 설명 없이 방송에서 갑작스럽게 하차해야 했던 일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지난 세월을 “행복한 빛깔”이라고 표현했다. “모든 시간을 감정의 조각으로 나눠보면, 슬픈 조각도 있고 기쁜 조각도 있고 보람찬 조각도 있고 버거운 조각도 있고 억울한 조각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 모든 조각이 모여서 만들어진 30년 6개월은 결국 행복한 빛깔이었지요. 부정적인 파편들이 전체의 색을 바꾸거나 훼손하진 못했거든요.”
김 아나운서는 퇴직 전 11년간 집이 있는 마포의 집에서 여의도까지 걸어서 출퇴근했다. “엄청 춥거나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 아니고서야 1년 250일 중 240일은 걸어서 다녔어요. 버스를 탈 때 느끼지 못한 자연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 시간을 통해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내며 감정을 샤워할 수 있었어요.” 부정적인 감정을 정리하는 자신만의 방식도 있었다. “기체처럼 따라다니는 감정을 고체로 만들어 나쁜 상황 속에 두고 오려고 했다”고 부연했다.
김 아나운서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었다. 불의의 사고 이후 괴로워하던 어머니는 발병한 간암으로 투병하다 13살 아들의 곁을 떠났다. 김 아나운서는 커다란 슬픔에 제대로 울지도 못한 채 울음을 삼켰다. 그 경험은 이후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작은 것에 감동하고, 자신을 아껴주던 장모님의 따뜻한 칭찬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그랬다. 김 아나운서는 “장모님이 지난해 돌아가시고 나서야 어린 시절 헤어진 엄마와 제대로 이별하지 못했다는 애도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했다. 김 아나운서는 지난 1월 그런 마음을 담은 에세이 ‘엄마의 얼굴’(달먹는 토끼)를 출간했다. 그는 “보편적인 슬픔은 누구나 겪어야 하는 일”이라며 “누구나 내 슬픔이 가장 힘든 것이다. ‘내가 그래도 되나’하며 감정을 유보하지 않고, 모두가 충분히 슬퍼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김 아나운서는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유학 중 갑작스럽게 귀국해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돌봤다. 신혼이던 아내는 친정에서 지냈고 코소보 선교를 준비하던 친구와 번갈아 가면 수개월간 간병을 이어갔다. KBS아나운서를 준비하고, 입사하면서도 그랬다. 김 아나운서는 “저는 퇴근하고 아버지를 돌보러 병원에 가야하기에 지금과 다른 예전 회식 문화 속에서도 입에 술을 대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교회 장로이기도 한 그는 교회 봉사와 해외 선교에도 적극적이었다. 특히 사교육을 받지 않은 아들 앞으로 모은 목돈으로 캄보디아에 학교를 세운 것을 계기로 현지 소년을 2011년 초청해 함께 지낸 경험도 있다. 이는 그와 가족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함께 밥 먹고 지낸 일상은 초청한 아이의 성격도 바꿔놓았다.
방학 기간 미술 피아노 태권도를 가르쳤고 함께 여행도 함께 떠났다. “모든 게 서툴러서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 거로 생각했는데 1년 뒤 캄보디아에 가서 아이를 다시 만나곤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리더십을 뽐내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바뀌었더라”고 했다. 이어 “집에서 밥숟가락 하나만 더 놨을 뿐인데 이런 변화가 생기다니 놀라울 뿐이었다”고 했다.
한 달을 가족처럼 지냈던 그 아이처럼, 김 아나운서 자신에게도 수많은 삶의 여정 속에서 크고 작은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고 말한다.
“돌이켜보면 저 역시 어렵고 힘든 시기에 기꺼이 손을 내밀어주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엄마의 빈자리를 이모, 고모, 교회 권사님들이 채워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도움을 받는 처지에선 ‘딱 두 달만 누가 도와줬으면…’하는 마음이 있거든요. 그 시기가 지나가기도 하고,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이틀이 됐든 한 달이 됐든 간에 그 당시에 저에게 온 마음을 쏟아서 도우려 했던 수호천사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때에 맞는 작은 도움들이 모여 우리의 인생이 굴러가는 건 아닐까요.”
신은정 기자 se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