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애 원장의 미용 에세이] 빠띡 뚤리스

입력 2025-10-16 10:28

우리 집에 20년이 넘는 쿠션이 두 개 있다.
낡았지만 몇 번 만지작거리면 빨아서 다시 쓰곤 한다. 한 개는 따뜻한 겨자색이고 또 한 개는 차분한 그린색이다. 가운데 모자이크 틀 속에는 열대의 야생화가 빼곡히 들어 있다. 내가 그것들을 아끼는 것은 추억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남편의 일터였던 인도네시아에서 살 때 바람 따라 나풀거리는 들꽃처럼 내 마음속 잔잔한 추억들이 떠오른다.

나는 인도네시아가 일 년 내내 더위만 계속되는 따분하고 지루한 곳일 거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가족이 그곳에 정착하였을 때 세 아이는 모두 유년기를 벗어나지 못한 어린아이들이었다. 나는 그 나라의 언어를 빨리 터득하기 위해서 토속 시장으로 자주 쇼핑을 다녔다. 우리나라 달구지 같은 차를 타고 그들의 문화를 알고자 하는 호기심으로 열린 장터를 찾았다. 처음에는 그들의 말을 들었을 때 마치 함석지붕에 떨어지는 소나기 소리처럼 시끄러웠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수첩을 꺼내 들고 ‘이니 압바?(이것은 무엇이냐?)’, ‘이니냐 바왕뿌띠(이것은 마늘이다).’라는 식으로 묻고 배웠다. 그들은 반복되는 질문에도 언제나 환하게 웃으며 또박또박 가르쳐 주었다. 때로는 내 손을 덥석 잡기도 하고 나를 끌어안기도 하면서 ‘요냐 사양 스칼리(부인 사랑스러워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날로그식으로 하루하루 언어 습득을 하게 되면서 한 달쯤 되자 혼자 시장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때로는 한국 음식도 만들어 이웃들과 함께 나누며 문화에 대한 다양한 정보도 얻게 됐다.

어느 날 학원에서 사귄 친구들과 빠띡 공장에 견학을 갔다. 열대지방의 특산품인 리넨과 순면 소재가 인기 있는 상품이었다. 면 재질의 직물들은 이미 유럽시장에 수출을 많이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체에 무해한 천연 염모제로 심오한 색들을 다양하게 만들어 냈다. 뚤리스라는 말은 그린다는 의미이다. 고객이 원하는 색상과 문양을 선택하여 주문하면 그 제품은 보통 2~4개월이 걸린다.

옛날 우리나라의 조선방직처럼 범위가 큰 직물공장이지만 옷을 직접 만들어 내는 살롱 스타일의 소규모도 많았다. 직접 그림을 그리는 곳은 대부분 고가의 하이패션 뿌띠끄로 인정받는 곳이다. 거대한 아틀리에가 곳곳에 있어 수십 명의 여성들이 제각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마치 곧 열릴 전시회를 앞둔 화가들이 작품에 열을 쏟는 것 같았다. 나는 그곳에서 하이패션과 홈패션을 구경했다. 모든 제품은 핸드메이드로 똑같은 제품은 없었다. 지금도 나는 여름에는 인도네시아의 빠띡을 가끔 입는다.

하나님은 흑인에게는 목소리와 힘을 선물로 주셨다는데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는 낙천적인 성품과 예술적 재능을 주셨나 보다. 그들의 문화를 접하고 예술작품을 감상하면서 인도네시아가 낙후되고 보잘것없는 나라라는 선입견을 지웠다. 그들이 게으르다는 편견을 가졌던 것이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게으른 민족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법이 다른 것이었다. 오랜 세월 더위에 적응하면서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하여 새벽을 살고 있는 그들은 비록 가난해도 불행을 느끼지 않는다.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다. 얼마 전 동남아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한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가까이하기 싫은 민족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인종차별 1위 국가가 한국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 결과에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는 불행했던 과거를 너무 빨리 잊는다. 지난날 받은 은혜도 현실 앞에서 쉽게 버리고 산다. 낮은 바닥에 앉아, 빠띡 뚤리스를 창조하는 소박한 그들에게서 겸허함을 배워야 한다.


<수어지옥水魚之獄>


어쩌다 머나먼 곳
고향 바다 떠나
좁은 유리관 속에 유배되었을까
대여섯 뼘도 안 되는 안식처

고독이 엄습해 숨 가쁘면
몸 추수리어 다시 도약하렴
망망대해 누비던 몸짓
풍랑에 뒤집히고
광란의 파도 타던 그 눈빛

현란한 은빛 턱시도
유연한 지느러미의 윤무를
밤하늘 별빛 아래
바다의 황홀한 꽃으로
영원을 간직할 순 없었을까

水魚之獄을 벗어나
되돌아가지 못하는 안식처
오직,
남은 순례의 길
생명이 가는 길
누구의 제물이 될 것인가

◇김국애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W)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계간 현대수필 운영이사, 수필집 ‘길을 묻는 사람’ 저자. 이메일 gukae8589@daum.net
정리=

전병선 선임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