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최우정, 극작가 배삼식, 연출가 정영두. 오는 25~26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오르는 국립오페라단의 신작 오페라 ‘화전가’는 세 아티스트가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일찌감치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들이 앞서 오페라, 음악극, 창극 등 음악과 드라마가 결합된 장르에서 각각 또는 함께 좋은 결과물을 보여준 바 있기 때문이다.
세 아티스트가 작곡, 극작, 연출로 함께 참여한 것은 2017년 초연된 서울돈화문국악당의 음악극 ‘적로’와 2022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마디와 매듭’에 이어 세 번째다. 공연을 앞두고 세 아티스트를 만나 ‘화전가’의 작업과정을 들었다.
작곡가·작가·연출가로 세 번째 작업
“국립오페라단이 (작곡가인) 제게 신작을 의뢰했을 때 바로 ‘화전가’를 제안했어요. 2020년 국립극단에서 공연한 배삼식 작가의 ‘화전가’ 대본을 먼저 읽었을 때부터 오페라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극 중 인물들의 절절한 사연이 노래를 만들어내고, 거기서 음악극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최)
최우정 작곡가는 연극, 오페라, 뮤지컬, 무용 등 극음악에 두드러진 활약을 펼쳐온 작곡가다. 특히 평단과 대중을 고루 만족시키며 레퍼토리로 살아남는 창작오페라가 손꼽히는 국내 오페라계에서 최 작곡가는 2014년 서울시오페라단의 ‘달이 물로 걸어오듯’과 2019년 국립오페라단의 ‘1945’로 큰 획을 남겼다. 그리고 배삼식 극작가는 연극, 창극, 뮤지컬, 마당놀이 등 다양한 장르의 극을 창작부터 번안까지 완성도 높게 선보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리듬감 있고 시적 이미지가 넘치는 그의 대사는 음악극에 적격이다. 국립창극단 ‘트로이의 여인들’ ‘리어’와 배우 김성녀의 모노 뮤지컬 ‘벽 속의 요정’ 등은 대표적이다.
배삼식 “희곡 쓸 때 콘체르토의 형식 의식"
국립오페라단의 ‘1945’와 ‘화전가’는 국립극단에서 공연한 배 작가의 희곡을 오페라로 옮긴 것이다. ‘1945’가 해방 직후 만주의 한국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머물렀던 전재민(戰災民) 구제소를 배경으로 다양한 인간군상을 그렸다면, ‘화전가’는 한국전쟁을 목전에 둔 1950년 4월 경북 안동의 김씨 집안을 배경으로 아홉 여인의 이야기를 그렸다.
“희곡을 오페라 대본으로 만들 때 희곡일 때의 장점을 빨리 포기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다행히 저는 그걸 어려워하지는 않아요. 게다가 ‘화전가’를 비롯해 근래 썼던 희곡들은 처음부터 콘체르토(협주곡)의 악장 형식을 의식했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4악장의 구성이라고 할 때 1악장은 안단테, 2악장은 알레그로 등을 생각하며 모티브를 어떻게 변주할지 상상했어요.”(배)
최 작곡가와 배 작가는 지난 2012년 서울시오페라단에서 창작오페라 개발을 위해 결성한 작곡가-대본가 모임인 ‘오페라 카메라타’에서 처음 만났다. 앞서 배 작가가 각색 및 가사를 담당했던 음악극 ‘벽 속의 요정’에 깊은 감동을 받았던 최 작곡가는 ‘오페라 카메라타’를 계기로 친분을 다지게 됐다. 그런가 하면 최 작곡가는 2013년 LG아트센터에서 글룩의 오페라 ‘에코와 나르시스’를 미디어 아트와 결합해 재구성하는 작업에서 정영두 안무가와 처음 만났다. 비슷한 예술적 가치관을 가진 이들 세 사람은 자주 만나는 친구이자 창작 동료 사이가 됐다.
최우정 “다양한 음악 활용한 악극 형식
“한국에서 창작오페라 또는 현대오페라는 재미가 없거나 어렵다는 인식이 팽배한데요. 원래 오페라는 탄생부터 열린 형식이며 실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주목한 것은 ‘악극’(樂劇)입니다. ‘화전가’는 19세기까지의 서양 클래식의 오페라 전통과 지금까지 한국에 있었던 악극 전통을 혼합한 오늘날의 악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 즈음의 민요와 동요 등 대중음악과 클래식 등 다양한 음악의 멜로디를 활용했어요. 여기에 이번 오페라에서 코러스(합창단)가 드라마 전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했습니다. 코러스가 연기, 노래뿐 아니라 움직임을 통해 드라마를 전달하기 때문에 안무가로도 활동하는 정영두 연출가를 섭외했습니다.”(최)
오페라 ‘화전가’가 원작 희곡과 비교할 때 가장 큰 차이점은 아홉 여인 외에 코러스가 등장하는 점이다. 코러스는 원작 희곡에서 출연진의 대화 속에 나오는 남편, 아들 등 남성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음악적인 기능을 하는 한편 1950년 당시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대중의 모습을 보여주는 등 다채롭게 활약한다. 올해 국립오페라단 합창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위너합창단이 코러스로 나선다.
“최우정 선생님이 구상한 음악적 구조에 대해 듣고 나서 희곡을 오페라 대본으로 바꾸는 작업을 했어요. 그리고 4막 가운데 2막까지 받은 최 선생님이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서 제가 3~4막에 대한 최 선생님의 음악적 아이디어를 참고해서 나머지 대본을 썼습니다. 그동안 여러 작품을 함께한 만큼 이번 협업 역시 순조로웠습니다.”(배)
정영두 “대본과 음악이 영감의 원천”
현재 배 작가의 대본과 최 작곡가의 음악을 무대에 구현하고 있는 연출가 정영두에 대해서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연극배우로 활동하다 무용수 겸 안무가로 활동 영역을 넓힌 그는 2007년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를 통해 연출가로 데뷔했다. 이후 자신의 무용 작업 외에 국악, 다원예술, 연극 등 다양한 공연에 참여한 그는 2017년 ‘적로’와 2022년 국립창극단 ‘리어’에서 본격적으로 연출가로 이름을 알렸다. 지난해 10월 런던 바비컨센터에 초청된 ‘리어’가 호평받으며 그는 올해 영국 공연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로런스 올리비에상 ‘오페라 우수 성취’ 부문 후보에 올랐다. 비록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연출력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오페라 연출은 ‘화전가’가 처음이지만 앞서 ‘적로’나 ‘리어’같은 음악극을 연출할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저의 모든 영감은 대본과 음악에서 나옵니다. 반복해서 대본을 읽고 음악을 듣다 보면 작품의 장면이 그림처럼 그려지고 인물들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리고나서 작품에 출연하는 솔리스트와 코러스에게 저의 해석을 설명했습니다. 참고로 저를 중심으로 프로덕션을 꾸렸던 ‘마디와 매듭’의 경우 배 작가와 최 작곡가님이 제 의도에 맞춰 작업하셨어요.”
정 연출가는 앞서 ‘적로’와 ‘리어’를 연출했을 때 안무가 출신답게 공간 활용, 배우들의 앙상블 그리고 리듬감 조절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에 ‘화전가’에서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언젠가 오페라 ‘열화일기만보’ ‘토지’ 올리고파”
“극 중 아홉 여인의 연기와 동선을 자연스럽게 찾는 동시에 코러스를 무대에서 유기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고민했어요. 코러스가 집단적 캐릭터를 가질 때도 있는가 하면 음악적인 기능으로만 존재할 때도 있는 만큼 그것을 작품 속에 잘 녹아들도록 했습니다. 이번 작품이 인물의 내면에 다가가는 작품인 만큼 출연진과 코러스의 섬세한 연기와 움직임이 중요한데, 다들 고마울 정도로 열심히 해주고 계십니다.”
세 아티스트는 이제 서로에게 ‘지음’(知音)이 됐다. 작업할 때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앞으로도 계속 함께 작업하고 싶다는 이들의 차기작이 궁금하다. 최 작곡가는 세 아티스트를 대신해 “기회가 된다면 배 작가가 2007년 연암 박지원의 생애와 그의 저서 ‘열하일기’를 가지고 우화적으로 쓴 ‘열화일기만보’를 오페라로 만들고 싶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를 3부작 오페라로 올리고 싶다”고 말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