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망한 벤처기업의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조성된 정부의 정책펀드가 오히려 벤처기업의 성장을 저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한 내 상장하지 못하면 오히려 투자사에게 수십억대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등 벤처기업에게 무리한 독소조항으로 투자계약을 맺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공정한 투자가 최근 급증하고 있음에도 실효성 있는 정부 제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국회 산자위 소속 이재관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2021년부터 2023년까지 한국벤처투자가 발견한 모태펀드 운용사의 ‘규약상 투자계약 체결 시 준수사항 위반’ 건수는 184건에 달했다. 2021년 39건에서 2023년 107건으로 3배나 급증한 수치다.
한국벤처투자가 구분하는 ‘모태펀드 투자계약 체결시 준수사항’에는 성과가 기대보며 낮다며 투자금을 조기 회수하거나, 상장에 실패했다고 투자계약에 명시된 주식 가격을 30% 이상 깎는 등의 불공정한 계약조건을 내세우는 걸 금지하고 있다. 준수사항엔 특정 매출액을 달성하지 못하면 투자금을 아예 돌려받을 수 있는 권리 등도 금지하고 있다.
한국의 모태펀드는 정부가 중소·벤처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중간 투자자인 VC(벤처캐피털)에 출자하는 방식으로, 일종의 ‘간접 펀드’다. 정부가 투자재원을 공급하고 투자결정은 한국벤처투자가 담당하는 방식이다. 국가 예산으로 스타트업 기업들을 키우기 위해 조성된 기금이다. 그런데 국가 예산을 받은 중간 투자자들이 불공정한 독소 조항을 투자 계약에 끼워넣음으로써 오히려 중소·벤처기업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는 셈이다.
정부 출자금 비중이 높은 대표적인 모태펀드 운용사 HB인베스트먼트(이하 HB)는 수제맥주 기업 코리아크래프트비어(이하 KCB)가 상장하지 못했다고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2016년 50억원을 투자할 당시 “2022년 말까지 IPO(기업공개)를 완료하지 못하면 원금과 함께 연복리 20%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한다”는 계약 조건이 근거였다.
그러나 법원은 HB에 대해 패소 판결했다. 1심 재판을 맡은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3월 “연복리 20% 손해배상 조항은 사실상 투자금 원금보장 및 확정수익을 보장하는 독소조항으로, 자본시장법상 투자취지에 반한다”고 판시했다. 계약서에 IPO 불발에 대한 스타트업의 책임이 명시된 것은 맞지만 계약 취지, 경영 노력 및 시장 환경 등을 고려하지 않은 배상금 요구는 벤처투자의 본질과 스타트업 육성 정책의 취지에 어긋난다는 게 법원 판단이었다.
이러한 투자계약상 독소조항 삽입뿐 아니라 접대 요구 등 다양한 방식의 ‘투자 갑질’이 투자계약 체결 과정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5년째 스타트업을 운영 중인 기업 대표 A씨(30)는 국민일보에 “VC가 투자지분 대비 과도한 지분을 요구하거나, 투자 실패의 위험을 회피하고자 지분 투자를 채권 형태로 전환하는 등 독소 조항이 관행처럼 굳어졌다”며 “10억원 이상 투자엔 대부분 이러한 독소조항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떤 유형이 실제로 얼마나 적발됐는지, 실제로 개선이 이루어졌는지는 모태펀드 투자결정권자인 한국벤처투자도 파악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 점검 결과는 단순 건수 집계에 그치고 있으며, 위반 유형별 통계나 개선 이행 여부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법·제도 상으로도 허점이 큰 상황이다. 현행 ‘벤처투자촉진법’엔 ‘부당행위’의 정의조차 없다. 불공정 계약이 적발돼도 제재할 법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이로 인해 모태펀드 운용사의 부당행위 관련 신고가 접수돼도 “법률 적용이 어렵다”는 이유로 사실조사조차 진행되지 않고 있다.
이 의원은 “스타트업 성장의 마중물이 되어야하는 모태펀드가 오히려 독소 조항으로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고 있다”며 “불공정 투자행위가 3배 증가했음에도 정부는 단순 집계에 그친 것은 현황파악조차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투자사의 불공정 투자행위로 스타트업의 성장을 가로막지 않도록 제도적 보완을 통해 벤처투자시장 활성화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웅희 기자 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