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혜란 “‘생계 걱정 안했으면’ 꿈 이뤄…저 대세 배우 맞죠”

입력 2025-10-13 06:00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영화 '어쩔수가없다' 등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펼친 배우 염혜란. 에이스팩토리 제공

배우 염혜란(49)에게는 놀라운 힘이 있다. 보는 이의 마음을 울린다. 그건 아마도 그가 연기하는 인물이 현실 속 누군가로 보이기 때문일 터다. 올초 인기몰이를 한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특히 그랬다. 남편 없이 자식 셋을 건사하기 위해 제주 해녀로 악착같이 살다가 감압병으로 스물아홉에 요절한 애순(아이유)의 엄마 광례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저리다.

그랬던 염혜란이 달라졌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에서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제지 회사에서 해고당해 재취업을 노리는 주인공 만수(이병헌)가 노리는 경쟁자인 범모(이성민)의 아내 아라 역을 맡았다. 아라는 연기 오디션에서 매번 떨어지면서도 자신감과 낭만을 잃지 않는 예술가적 인물로, 등장할 때마다 관능미를 뿜어낸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염혜란은 “아라는 관능적인 느낌이 나야 하는데 내가 그런 이미지는 아니잖나. ‘감독님이 혹시 내 전작을 안 보고 출연 제안을 하셨나’ 싶었는데 이미 보셨다고 하더라”면서 “감독님께 말씀드렸더니 ‘그건 나와 스태프들이 할 고민이다. 예상되는 배우보다 당신이 하는 게 재미있을 거라 판단했다’고 얘기해주셔서 믿음을 갖고 도전했다”고 말했다.

아라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 외적인 부분부터 바꿔 나갔다. 일단 다이어트를 했다. 손톱 연장이란 것도 처음 해 봤다. “네일아트를 받고 속눈썹도 붙였어요. 긴 머리를 포기하지 않는 인물이란 설정이어서 가발도 썼죠. 의상에도 신경을 썼어요. 아라는 나이가 들어도 자신을 놓지 않는, 끊임없이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였으니까요.”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아라를 연기한 배우 염혜란. CJ ENM 제공

염혜란은 “박 감독님과 처음으로 작업을 한다는 게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떨리고 두렵기도 했다”면서 “최근작인 넷플릭스 시리즈 ‘마스크걸’(2023)이나 ‘폭싹 속았수다’를 본 대중이 아라를 얼마만큼 받아들여 주실지 걱정이 많이 됐다”고 털어놨다.

이어 “류성희 미술감독님이 ‘그렇게 떨리면 현장에 자주 놀러 오라. 편해질수록 좋은 연기가 나온다’고 조언해 주셨다”며 “내 촬영이 아니어도 스케줄이 될 때마다 현장에 갔다. 시나리오에서 본 장면이 결과물로 나오는 과정을 지켜보며 경이로웠다”고 돌이켰다.

처음엔 아라가 자신과 너무도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뜯어보니 닮은 구석도 있었다. 염혜란은 “배우로서 뭔가를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나 ‘이 일을 못하면 다른 거라도 해야지’ 하는 주관이 닮았더라. 나도 현실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전했다. 이어 “연기할 땐 인물과 나의 접점을 만드는 편이다. 연기는 ‘나’에서 출발해 인물에 도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2000년부터 대학로 연극 무대를 누빈 염혜란은 2003년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단역으로 처음 영화에 출연했다. 대중적으로 주목받은 건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tvN·2016)였다. 이후 ‘도깨비’(tvN·2016) ‘동백꽃 필 무렵’(KBS2·2019) ‘경이로운 소문’(OCN·2020) ‘더 글로리’(넷플릭스·2022), 영화 ‘아이 캔 스피크’ 등 굵직한 작품에 연달아 출연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배우 염혜란. CJ ENM 제공

올해에만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서초동’(tvN), 영화 ‘바이러스’ ‘84제곱미터’ ‘어쩔수가없다’를 선보인 그는 명실상부한 ‘대세 배우’로 꼽힌다. 그는 “저도 요즘 무대인사 가면 ‘대세 배우 염혜란’이라고 인사한다. 박 감독님과 이병헌, 손예진, 박희순, 이성민 등 어마어마한 배우들이랑 함께하는데 대세가 아니면 뭐겠나. 귀한 기회가 온 것 같다”며 웃어 보였다.

염혜란은 가난한 연극 배우 시절 품었던 꿈을 이미 이뤘다고 했다. “과거 제 꿈은 ‘아르바이트 안 하고 온전히 연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박찬욱 감독 영화에 출연하거나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 그런 큰 꿈이 아니었어요. 생계 걱정만 안 했으면, 그게 다였죠. 문득 돌아보니 ‘그리 갈망했던 일을 지금 하고 있구나. 그래도 나 잘하고 있었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염혜란에게 현재 꿈은 무엇이냐 물으니 역시 소박한 답이 돌아왔다. “다음 작업을 잘해야지, 그런 생각뿐이에요(웃음).” 그는 또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광례 이미지가 워낙 짙게 남아서 요즘 어딜 가든 저를 엄마 보듯 바라보거나 안타까워하며 우는 분도 계세요. 너무 감사하지만, 이미지가 고정되는 건 두렵거든요.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보며 다양하게 시도하려 합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