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감독의 영화 ‘얼굴’은 여러모로 독특하다. 제작비 2억원으로 단 13회 촬영 만에 완성됐다. 기존 영화 제작의 틀을 깨부순 파격 시도였다. 이 작품이 개봉 25일 만인 지난 5일 누적 관객 수 100만명을 넘어서며 제작비의 50배가 넘는 매출액을 기록한 것은 한국 영화계에 새로운 이정표가 될 만하다.
영화에는 특별한 지점이 하나 더 있다. 배우의 얼굴이 끝끝내 나오지 않는 배역이 있다는 것이다. 실질적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정영희 역이다. 못생겼다는 이유로 평생 조롱받고 멸시당하는 영희는 1970년대의 야만성과 몰인간성을 고스란히 비춰내는 인물이다. 이 ‘얼굴 없는’ 역할에 과감하게 도전한 이는 배우 신현빈(39)이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신현빈은 “연 감독님의 전작 ‘계시록’(2025)을 촬영하던 당시 ‘얼굴’ 출연 제안을 받았다”며 “감독님 요청 때문에 응했다기보다는, 이야기 자체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얼굴이 나오지 않는 역할이란 점에서도 도전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관객 100만명을 돌파할 정도로 큰 호응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신현빈은 “이 영화를 처음 만들기로 했을 때는 지금 같은 상황을 생각하지 못했다. ‘관객들이 좋아해 주실까? 너무 무겁게 느껴지진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면서 “관객들이 영화가 가진 특수성을 배제하고 일반적인 상업영화로 받아들여 주신 것이 신기하다”며 미소를 보였다.
‘얼굴’은 시각장애인으로 평생을 살면서 남에게 천대받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쳐 온 임영규(권해효)와 그의 아들 임동환(박정민)이 40년 만에 백골 사체로 돌아온 아내이자 어머니 정영희(신현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는 이야기다. 시각장애인 남편도, 갓난아기였던 아들도 본 적이 없는 영희의 얼굴은 내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신현빈은 극 중 목소리와 몸짓만으로 인물을 표현했다. 주저하는 손과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로 인물의 주눅 든 성격을 드러내고, 굽은 등에는 고된 삶의 무게를 담아냈다. 영화를 본 이들 사이에서는 그의 연기에 대한 호평이 쇄도했다. 신현빈은 “이번 작품으로 칭찬받는 것이 흥미롭다. (그동안은) 내 얼굴이 문제였나 하는 생각이 든다”며 웃었다.
“긍정적 반응에는 캐릭터에 대한 평가도 반영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캐릭터가 그만큼 (관객의 마음에) 가닿은 것이죠. 사실 연기하면서 고민이 많았고, 두려운 마음도 컸어요. 얼굴이 안 나오다 보니 저의 감정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다른 배우의 연기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리란 부담이 있었는데, 잘 전달된 것 같아 다행스럽습니다.”
신현빈은 “연기하는 내내 영희가 불쌍했다. 가족으로부터 시작된 오해와 멸시 속에 살아 온 사람인데 영규를 만나 희망을 품었으나 끝내 무너질 때 비참한 감정이 들었다”면서 “누가 이 사람을 못났다고 할 수 있을까. 그는 평범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인데, 시대와 맞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마음이 아팠고, 그의 외로웠던 삶을 잘 전달하고 싶었다”고 했다.
무대인사를 돌며 실제 관객 반응을 마주하고 비로소 자신의 연기에 대한 확신과 안도감을 얻었다. 그는 “관객 중 우는 분들이 꽤 있더라. 영희의 아픔에 공감해 주신다는 생각에 감사했다”며 “영희만큼은 아니어도, 우리도 어디선가 그런 상처를 경험했던 게 아닐까. 본인 경험을 돌이키게 되면서 인물에 더 공감하게 되는 거 같다”고 말했다.
신현빈의 차기작은 내년 개봉 예정인 연 감독의 영화 ‘군체’다. 어쩌다 보니 연 감독 작품 세 편을 연달아 하게 됐다. 그는 “각기 다른 작품이라 매력적이었다. ‘계시록’은 좀비가 등장하지 않고 머릿속 불편한 감정이 형상화된다는 점에서 감독님의 기존 영화와 달랐고, ‘얼굴’은 상업영화에서 만나기 힘든 작품이었다”고 설명했다.
‘군체’는 전지현, 구교환, 지창욱, 고수 등이 출연하는 제작비 200억원대 대작이다. 신현빈은 “‘군체’는 여러 배우가 나오는 장르물인데, 이런 작품을 해본 적이 없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작품 선택할 때는 전에 했던 것과 다른 것에 흥미를 느낀다. 다양해야 보시는 분들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다”며 미소를 지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