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미 양국이 발표한 환율 합의에 ‘정부 투자기관의 해외 투자를 의도적으로 환율을 조정하는 데 활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미국이 얼마 전 환율 보고서에서도 언급한 국민연금의 환율 방어 기능을 염두한 조항으로 풀이된다. 막상 외환 당국은 해당 내용이 국민연금과는 무관하다고 밝혀 인식이 엇갈리는 모습을 보였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천하람 개혁신당 의원실이 6일 한국은행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한은은 국민연금 환헤지와 해당 합의 내용의 관계를 묻는 질의에 “금번 합의문은 정부투자기관의 해외투자가 자산다각화·위험관리 등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면서 “국민연금이 이미 이에 부합하게 독립적으로 운용되고 있다는 점에 양국 간 이견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변했다.
국민연금의 환헤지란 원·달러 환율이 국민연금이 자체적으로 정한 기준선 이상 올라갈 때 보유한 해외 자산의 일부를 선물환(사전에 약정한 환율로 진행하는 매수·매도) 거래를 통해 매도하는 행위를 뜻한다. 국민연금 입장에서는 환율 상승기에 적당선에서 환차익을 실현해 자산 가치를 방어하는 효과가 있다. 국내 외환시장에서는 환율이 치솟을 때 달러 공급량을 늘려 원화 가치를 방어하는 역할을 한다.
12·3 비상계엄 사태의 여파로 환율이 1450원대까지 올랐던 지난 연말과 올 초에도 국민연금 환헤지는 국내 외환시장의 ‘환율 방파제’로 활약했다. 업계에서는 지난 6월 조기 종료 이전까지 국민연금이 150억 달러 규모의 전략적 환헤지를 실시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환헤지의 실행 수단으로 활용되는 국민연금과 한은 간 외환 스와프 건수는 2023년 21건, 지난해 25건에서 올해 상반기에만 84건으로 급증했다.
문제는 최근 미국이 국민연금의 이 같은 역할을 주시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지난 6월 미 재무부는 한국을 환율 관찰대상국으로 재지정하면서 보고서에서 국민연금의 외환 스화프를 원화 가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으로 지목했다. 국민연금이 지난해 외화 선물환 매입 한도를 10억 달러에서 30억 달러로 3배 늘리고 한은과의 스와프 한도를 500억 달러에서 650억 달러로 확대한 점이 명시됐다.
합의문의 정부투자기관 관련 문구도 사실상 국민연금을 겨냥해 작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양국은 합의문에서 “정부투자기관의 해외투자는 위험조정과 투자 다변화 목적에 따라 이뤄져야 하며 경쟁적 목적의 환율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당초 미국 측이 마련한 초안은 아예 국민연금을 명확히 언급했지만 한국 정부의 설득으로 최종안에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빠졌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현재는 의도적 원화 절하를 통한 환율 상승을 방지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만큼 국민연금 환헤지를 당장 차단하려 들 가능성은 낮다고 봤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이전만큼 국민연금에 의존하지 않는 외환 정책을 펼칠 필요가 커졌다는 평가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원화 절하로 환율이 올라 관세 효과가 상쇄되는 걸 막고 싶은 미국 입장에서 환율을 낮추는 국민연금은 당장 막으려 들 대상은 아니다”라면서도 “국민연금과 한은이 외환을 주고받는 식으로 외환 시장에 개입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미국의 인식”이라고 말했다.
이의재 기자 sentin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