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빽빽한 빌딩 숲 사이로 하얀 벽과 붉은 벽돌이 어우러진 예배당이 단정히 서 있다. 도심의 콘크리트 건물들 틈에서도 교회는 오래된 숨결을 품고 있었다. 지난 5일 찾은 초동교회(손성호 목사)였다.
이날 교회는 창립 80주년을 맞아 ‘힘써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 1:10)를 주제로 기념예배를 드렸다. 1945년 해방과 함께 태어나 6·25전쟁과 산업화, 민주화의 격랑을 지나온 교회. 그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도심 한복판 예배당 안에는 세대를 잇는 신앙의 고백이 울려 퍼졌다.
진회색 빛을 머금은 정장 차림의 노신사가 천천히 예배당 안으로 들어왔다. 김천규(91) 원로장로였다. 지팡이를 짚은 손끝이 떨렸지만, 눈빛은 여전히 또렷했다. 그는 “우리 교회 역사는 참 아름답다”며 “전쟁도, 민주화의 혼란도 지나왔지만 하나님은 이 예배당 안에 계셨다”고 회고했다.
김 장로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 “세상이 어지러워도 교회만은 나와야 한다는 걸 절실히 느꼈어요.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교회 가운데서도 초동교회는 제일 오래되고 뜻 있는 교회지요. 지금은 건강 문제로 자주 못 나오지만, 오늘은 꼭 와야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예배당 한쪽에는 또 다른 원로 성도가 앉아 있었다. 최웅섭(92) 권사는 초동교회와의 인연을 ‘인생의 근본’이라 표현했다. 그는 “교회 초창기부터 출석했다. 그때 이 교회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도 했다”며 “우리 교회는 세월이 흘러도 늘 따뜻하고 진심이 있는 교회”라고 설명했다.
예배가 시작되자 찬송이 예배당 안을 가득 채웠다. 손성호 목사가 단상에 올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라는 제목의 설교를 전했다. 그는 “우리 교회는 언제나 ‘에바다(열려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따라 걸어왔다”며 “말 못 하고 듣지 못하던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를 깨우셨다”고 말했다.
손 목사는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설명이 아니라 만남”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라’ 하셨을 때 바디메오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주님께 나아갔다”며 “우리도 오늘, 주님이 ‘그를 부르신다’ 하신 음성에 응답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믿음은 듣는 데서 시작되고, 듣는 믿음은 순종으로 완성된다”며 “주님과 함께 눈을 뜨고, 복음을 직접 보고 살아가는 교회가 되자”고 당부했다.
초동교회의 시작은 45년 8월 해방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인 장로교회였던 경성약초정교회를 조선인 신자들이 넘겨받아 첫 예배를 드린 것이 교회의 출발이었다. 다섯 가정이 모여 시작된 초동교회는 중구 초동 을지로 시대를 거쳐 72년부터 종로3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80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 이곳은 상업지대와 주거지가 뒤섞인 ‘도심의 변두리’였다. 화려한 성전을 짓기보다, 세상 한복판에 예배당 한 채를 세우는 것이 교회의 선택이었다.
초동교회는 ‘참교회, 참그리스도인, 믿음의 한가족’이라는 모토 아래 교회의 본질과 공동체성을 지켜왔다. 손 목사는 “초동 일대는 집창촌이자 민중의 땅이었고, 종묘사직과 맞닿은 자리였다”며 “세상 속에 예수의 몸을 세우자는 신앙으로 이곳에 섰다”고 설명했다.
교회는 창립 때부터 대형화를 지양해왔다. 목회자가 교인을 모두 알고, 교인들도 서로를 가족처럼 아는 교회를 만들자는 설립 취지 때문이다. 지금까지 국내 안팎으로 교회를 분립 개척하고 있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만 9개에 이른다.
교회는 지역과의 유대를 쌓으며 선교와 나눔의 사역에 힘쓰고 있다. 예배당 옆 선교관 ‘초동학사’를 통해 서울로 유학 온 기장 청년들을 돕고, 탈북 신학생에게 장학과 생활 지원을 이어간다. ‘돈의동 선교연대’와 나눔식탁, 쉼터, ‘기드온섬김용사운동’을 통해 지역 이웃과 난민을 섬기며 매일 복음을 나누고 있다.
손 목사는 “초동교회는 도심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공동체”라며 “지난 80년 동안 지켜온 믿음의 전통을 이어가되 오늘의 세대가 복음으로 세상을 섬기고 다음세대를 품는 교회로 서가겠다”고 말했다.
글·사진=김동규 기자 k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