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제주 은갈치가 맛있는 이유

입력 2025-10-04 05:00
제주의 대표 음식 중 하나인 갈치 조림. 연합뉴스

사시사철 손님으로 북적이는 제주의 갈치음식점. 갈치 요리는 흑돼지, 고기 국수와 함께 제주 여행에서 반드시 맛봐야 할 대표 음식으로 꼽힌다.

갈치 한 마리를 통째로 구워내는 통갈치구이는 8만원에서 많게는 14만원까지 가격이 꽤 나가지만, 이름난 식당 앞에는 줄이 끊이지 않는다. 관광객들은 “바다를 보며 먹는 갈치 한 점이 제주 여행의 감성을 완성시켜준다”고 말한다.

30일 새벽, 제주시 서부두 수협 위판장. 어둠이 가시지 않은 부두에 5t급 채낚기 어선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밤바다를 누비고 돌아온 배마다 은빛 갈치가 어상자에 가득했다. 전국 각지로 향할 갈치들이 빠르게 위판장을 채워나갔다.

30일 제주시 수협 위판장에서 갈치 경매가 진행되고 있다. 문정임 기자

오전 5시 56분, ‘삑삑’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지며 경매 시작을 알렸다. 고요하던 공간은 순식간에 활기를 띠었다. 파란 모자를 쓴 중매인들이 빠르게 어상자를 살펴보고 낙찰가를 가늠했다.

경매는 덩치 큰 물건부터 시작됐다. 어상자마다 숫자가 적힌 종이가 붙었다. 숫자는 상자에 담긴 갈치의 수를 뜻한다. 이날 가장 높은 가격에 낙찰된 것은 9미 짜리다. 낙찰가는 68만원. 두툼하게 살이 오른 갈치는 마리당 무게가 1㎏이 넘었다.

경매가 끝나자 좌판에 생선이 빠르게 채워졌다. 위판장 주변은 싱싱한 물건을 저렴한 가격에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한 가족은 굵은 갈치 네 마리를 9만원에 구매했다. 손님은 물건이 마음에 드는 듯 포장을 기다리는 내내 표정이 밝았다. 가게 주인은 “추석 택배가 마감돼서 오늘은 물건이 좀 싸다”고 말해주었다.

제주시 수협 위판장 앞 생선 가게에 이날 들어온 생물 갈치가 진열돼 있다. 문정임 기자

# 낚시로 잡는 당일바리 갈치

제주 갈치가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은 데는 ‘채낚기 방식’으로 잡은 당일바리 은갈치의 힘이 크다. 가까운 바다에서 낚시로 잡은 은갈치는 그물에 걸려 잡히는 먹갈치보다 선도가 뛰어나다.

여수나 통영, 목포 등 남해안 지역에서도 채낚기 갈치 조업이 이뤄지지만, 제주 해역은 동중국해에서 올라오는 갈치의 주요 이동 경로에 위치해 있어 어획량이 많고 씨알도 굵다.

먼 바다에 잡아 선상에서 급속 냉동 처리한 선동갈치도 있지만, 제주에서 주로 소비되는 것은 얼음을 채워 저장한 빙장갈치다.

빙장갈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어획된다. 긴 낚싯줄을 바다에 펼쳐놓았다가 걷어들이는 ‘주낙’과, 낚싯대로 하나하나 끌어올리는 ‘채낚기’다.

가장 신선한 갈치는 채낚기로 잡아 당일 위판장에 도착한 생물 갈치다. 유통상으로는 빙장갈치로 분류되지만, 선도와 식감이 뛰어나 가격이 높고 소비자 선호도도 높다.

채낚기 어업은 주로 5~10t급 소형 어선을 이용해 제주 연안에서 이뤄진다. 오후 3시쯤 출항해 해가 지면 집어등을 켜고 갈치를 낚아 새벽 경매에 맞춰 입항한다. 하나하나 낚싯대로 끌어올리는 방식이라 비늘 손상이 적고 선도 유지가 뛰어나다. 제주 은갈치의 명성에 가장 부합하는 방식이다.

# 가을 갈치, 지금이 제맛

갈치는 지금 이맘때가 가장 맛이 좋다. 갈치는 여름철 산란을 마친 뒤 가을이 되면 겨울을 대비해 영양분을 축적하기 때문에 살이 통통하게 오른다. ‘봄 도다리보다 가을 갈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시기의 갈치는 맛과 품질이 모두 뛰어나다.

특히 갈치는 고단백·고불포화지방 생선으로, 가을철에는 단백질과 오메가-3 지방산 함량이 높아져 건강식으로도 제격이다.

채낚기 작업은 6월부터 시작되지만, 수온이 떨어지는 가을부터 제주 연안으로 갈치가 몰려들어 어획량이 늘어난다. 다만 큰 갈치는 12월이 지나야 본격적으로 잡힌다. 일반적으로 10㎏상자 당 13미 이하를 ‘큰 갈치’로 분류한다.

제주에서도 먹갈치가 어획되기는 한다. 가을철 참조기를 잡기 위해 펼쳐둔 그물에 갈치가 함께 걸려드는 경우다. 이렇게 잡힌 먹갈치는 대부분 육지로 간다.

이날 위판장에서 만난 한 중매인은 “먹갈치는 수심이 깊은 곳에서 잡히기 때문에 식감이 탄력있고 고소하다”며 “육지에는 먹갈치를 선호하는 소비자가 많아 제주에서 잡힌 먹갈치는 대부분 육지로 보낸다”고 말했다.

제주의 한 초가에서 두 여성이 '마다리(마대의 제주어)' 위에 놓인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가을걷이로 수확한 호박들이 놓여 있다. 고영일 사진, 제주도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2'에서 발췌.

#중산간 사람들이 먼저 먹던 생선

과거 제주 사람들에게 갈치는 가을 수확철의 대표적인 생선이었다.

봄에 먼바다에 머물던 갈치가 가을이 되어 제주 연안으로 돌아오면, 추석 전 추분(9월 23일)부터 상강(10월23일)까지 갈치잡이가 이어졌다.

갈치는 고등어처럼 쉽게 상하는 생선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금에 절여 항아리에 넣어두었다가 가을 곡식을 걷을 때 일꾼들의 반찬으로 내놓아 밭에서 구워먹는 일이 많았다.

갈치가 제철을 맞을 즈음, 밭에서는 늙은 호박도 익어갔다. 제주 사람들은 갈치에 늙은 호박을 넣어 끓인 갈치호박국을 가을 제삿상에 올리거나 귀한 손님이 왔을 때 내어놓았다.

제주 생활사 연구가 고광민씨는 “갈치는 알드르(해안 지역을 뜻하는 제주어) 사람보다 웃드르(산간 지역을 뜻하는 제주어) 사람이 먼저 먹는 생선”이라고 말했다. 여름 자리철이 끝나고 겨울 옥돔이 잡히기 전까지 산간 마을 집집마다 갈치 수요가 많았다는 뜻이다.

고씨는 “화북(제주시)에서 밤에 갈치를 낚아 집으로 가져오면, 안사람이 갈치를 들고 상창(서귀포시 안덕면)까지 가서 팔았다”며 “상창은 넓은 밭이 많았는데, 당시 메밀 수확철에 인부들에게 먹일 음식이 갈치 말고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지역 경제 이끄는 은빛 생선

서귀포시는 9월의 수산물로 갈치를 선정했다. 제주 갈치는 사계절 내내 어획되지만, 이 무렵이 가장 맛있기 때문이다. 갈치는 서귀포수협 연간 위판액의 90%를 차지한다. 중매인을 비롯해 시장 상인, 식당, 택배 판매업까지 갈치를 중심으로 한 생업이 촘촘히 연결돼 있다.

제주도는 더 많은 관광객들이 갈치 요리를 부담없이 즐길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인식 판매를 권장하고, 갈치 요리 할인 행사를 진행한다.

지난 8월에는 공공 관광플랫폼 ‘탐나오’를 통해 30% 갈치 요리 할인 쿠폰을 제공했다. 하반기에도 갈치 요리를 비롯한 제주의 대표 음식을 판매하는 식당을 대상으로 공모를 실시해 할인 쿠폰을 지급할 계획이다.

자치경찰단은 갈치 전문 식당을 대상으로 원산지 점검을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지난 5월에는 식당 리뷰 1000건 이상 중·대형 식당 62곳을 대상으로 점검을 벌였다. 조사 결과 원산지를 허위로 표기해 부당이득을 챙긴 업소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추석을 앞둔 제주 앞바다에는 오늘도 집어등을 밝힌 갈치잡이 어선들이 분주하게 조업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제주도의 연간 갈치 어획량은 1만9237t으로, 우리나라 전체 어획량(4만3773t)의 35%를 차지했다.

※이 기사는 제주특별자치도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