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이우환 화백의 그림이 또다시 ‘가짜’ 논란에 휩싸였다. 김건희 특검이 김 여사 청탁 의혹과 관련해 이 화백 그림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위작 논란으로 불똥이 튄 것이다. 미술계의 해묵은 난제인 ‘진품·가품 스캔들’이 권력형 비리 사건과 엮이며 작품의 진위 판단이 핵심 쟁점으로 부상한 모습이다. 일각에서는 이 화백 그림의 진위 논란이 사건을 ‘미궁’에 빠뜨릴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특검 수사로 소환된 이 화백의 작품은 ‘점으로부터 No.800298’이다. 1970년대 시작된 이 화백의 대표 시리즈 중 하나다. 화폭 위에 큰 점 7개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줄로 그려 넣었다. 특검은 김상민 전 검사가 지난해 4·10 총선 공천이나 공직 인사를 보장받을 목적으로 1억4000만원 상당의 이 그림을 구매한 뒤 김 여사 오빠 김진우씨에게 전달했다고 보고 있다. 특검은 그림의 최종 도착지를 김 여사로 특정한 상태다.
문제는 작품의 진위 감정 결과가 엇갈렸다는 점이다. 앞서 특검은 대만 경매 업체에 나온 이 그림이 김 전 검사에게 흘러 들어간 경로를 되짚은 뒤 감정을 맡겼다. 한국화랑협회는 위작, 한국미술품감정센터는 진품 판정을 내놨다.
미술감정업계 관계자는 4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가뜩이나 작품의 진위는 쉽게 단정 지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1 대 1’ 구도가 되면서 판단이 더욱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미술계에선 감정평가가 예술과 과학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전문가의 해석이 개입되는 일이라 ‘모 아니면 도’ 식의 판단은 애초 어렵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 때문에 미술품 진위 논란은 결국 미제로 남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고(故)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가 대표적이다. 미인도 위작 논쟁은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작품을 공개한 이래 34년째 계속되고 있다. 당시 천 화백은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나”라며 자신의 그림이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국립현대미술관 측이 “진품”이라고 맞서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진위 공방이 본격화한 건 2015년 천 화백 별세 이후다. 천 화백 유족 측이 바르토메우 마리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장 등 6명을 사자명예훼손 등 혐의로 고소한 것이다. 유족 의뢰로 평가에 나선 프랑스 감정단은 “진품일 가능성은 0.00002%”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서울중앙지검의 판단은 정반대였다. 검찰은 8개월간의 조사를 거쳐 전문기관의 과학감정, 전문가 안목 감정, 미술계 자문 등을 종합해 미인도가 진품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후 유족 측은 검찰을 상대로 “허위 사실을 유포해 명예를 훼손했다”며 국가배상 소송까지 제기했지만, 지난달 4일 대법원에서 심리불속행 기각 판단이 내려지며 최종 패소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도 법원이 최종적인 진위 판단을 내린 건 아니었다. 검찰 수사 당시 감정을 벌인 9명 중 4명이 ‘진작(진짜 작품)’, 3명은 ‘위작’, 2명은 ‘판단 불명’ 의견을 내린 것으로 뒤늦게 드러났다. 진위 논란이 언제든 다시 불거질 수 있는 상황인 셈이다.
이 화백 그림의 위조 논란은 처음이 아니다. 이전 사례는 2016년에 있었다. 당시 경찰은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화랑과 위작 제조범들이 이 화백의 그림 13점을 조직적으로 유통했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제조범의 자백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과학감정을 통해 위작 결론을 도출했는데, 이 화백은 “저만의 호흡, 리듬, 색채로 그린 작품으로서 작가인 제가 눈으로 확인한 바 틀림없는 저의 그림”이라고 주장해 열띤 진위 공방이 벌어졌다.
이번에 벌어진 이 화백 작품 진위 논란은 권력형 비리를 다루는 특검 수사와 맞물리면서 판단이 더 어려워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미술계 한 인사는 “현 시점에서 막말로 누가 진품이라고 한들 절대적으로 100% 증명할 방법이 있긴 하느냐”며 “이 화백이 직접 나설 가능성도 적어 지금 같을 땐 진위를 급히 결론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검의 감정 의뢰를 받은 두 기관이 상반된 감정 결과를 내놓으면서 향후 법정 공방이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작품 진위에 따라 가액이 다르게 산정되고, 적용되는 혐의도 다르기 때문이다.
특검은 현재 김 여사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혐의 피의자로 본다. 뇌물 혐의는 물품 가액이 3000만원을 넘어가면 형법상 뇌물죄가 아닌 특가법상 뇌물죄가 적용돼 가중 처벌한다. 특검이 이 화백 그림을 3000만원 이상이라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다만 뇌물 혐의는 공무원이 직무와 관련해 뇌물을 수수·요구·약속한 경우 성립하기 때문에 김 여사가 윤석열 전 대통령과 공모했다는 점을 입증하는 게 특검의 과제다.
반면 김 전 검사 측은 작품이 위작일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이 화백 그림이 위작으로 판정되고 평가액이 청탁금지법 위반 기준액인 ‘1회 100만원 또는 매 회계연도 총 300만원’을 넘지 않으면 김 전 검사가 과태료 처분만 받는 데 그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 경우 김 여사는 청탁금지법상 공직자 배우자의 처벌 조항이 없어 무혐의 처분을 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박장군 기자 genera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