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도 받는데!” “안 주면 미국 모욕”…트럼프의 ‘노벨평화상 앓이’

입력 2025-10-05 00:01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버지니아주 콴티코 해병대 기지에서 군 장성들을 대상으로 연설한 뒤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다. 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에게 유일하게 ‘갑’ 노릇을 할 수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 노르웨이밖에 없다.” 워싱턴DC 외교가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떠도는 이야기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무역 전쟁을 벌이며 ‘슈퍼 갑’이 된 트럼프 대통령의 남은 버킷리스트는 노벨평화상 수상이다. 노벨평화상을 결정하는 단체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이기 때문에 노르웨이만이 트럼프에게 당당할 수 있다는 취지의 얘기다. 문학상·경제학상 등 노벨상의 다른 부문은 스웨덴 왕립아카데미가 수여하는 것과 달리, 평화상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준다. 위원 5명은 모두 노르웨이 국적이다.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의 모습. 연합뉴스

노벨평화상 수상을 향한 트럼프의 집념은 점입가경이다. 스스로 노벨상을 탈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셀프 추천’부터, 노벨위원회는 원래 공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에게 상을 주지 않는다는 ‘음모론’, 자신이 받지 못하면 미국에 대한 모욕이라는 ‘국격 프레임’까지 각종 내러티브가 등장한다. 외신들은 “노벨평화상 수상을 위해 로비를 벌인 이들은 많지만 트럼프만큼 강도 높게 추진한 사람은 없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트럼프의 노벨상 최신 레퍼토리는 “세계에서 7개의 분쟁을 해결했다”는 ‘피스메이커론’이다. 자신이 지난 1월 취임한 이후 인도·파키스탄 분쟁, 이란·이스라엘 분쟁 등 7개를 해결해 전 세계에 평화를 가져왔다는 주장이다.

그는 지난달 23일(현지시간)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도 “나는 7개의 전쟁을 끝냈다”며 “모두가 내가 노벨상을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고 했다. 트럼프는 지난달 30일 미국의 장성 수백 명을 모아두고 한 연설에서도 7개의 분쟁을 해결했다고 주장하며 “노벨상을 받느냐고? 절대 아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그것을 줄 것이다. 트럼프의 사고방식과 전쟁 해결에 대한 책을 쓴 사람에게나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수상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나라가 그것을 받길 원한다”며 자신이 수상하지 못한다면 “우리나라에 큰 모욕”이라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트럼프의 ‘노벨상 앓이’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트럼프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2009년 이후부터 자신도 충분히 자격이 된다고 주장해왔다. 지난해 대선 캠페인 당시에는 “내 이름이 오바마였다면, 나는 10초 만에 노벨상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트럼프 1기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존 볼턴은 “트럼프는 오바마가 노벨평화상을 받는 것을 보고, 오바마가 아무것도 안 하고 상을 받았다면 자신도 받을 수 있지 않겠냐고 생각했다”며 “그의 정치적 삶은 자기를 빛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고 노벨평화상이란 것도 그저 벽에 걸어두면 근사해 보이는 장식품일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트럼프의 노벨상 집착은 타국 정상들의 외교 소재가 되기도 한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지난 7월 트럼프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는 서한을 노벨위원회에 전달했다. 한국 이재명 대통령도 지난달 18일 공개된 시사주간지 타임 인터뷰에서 ‘북한과의 화해를 위해 트럼프 대통령을 노벨평화상에 추천할 의향이 있냐’는 질문에 ”그 문제(북한 문제)에 있어서 구체적인 진전이 있다면 그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다른 사람은 없다”고 답했다. 파키스탄, 캄보디아 등도 트럼프를 노벨평화상에 공식 추천하며 ‘띄우기’에 나섰다. 트럼프의 노벨상 집착을 겨냥한 일종의 ‘아첨 외교’라고 할 수 있다.

트럼프의 시끌벅적한 노벨상 집착에도 노벨위원회는 침착하다. 크리스티안 베르그 하르프비켄 노벨위원회 사무국장은 지난달 12일 AFP 인터뷰에서 “물론 특정 후보에 언론 관심이 쏠리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고 있다”며 “그러나 그것이 위원회 내부 논의에 영향 주는 일은 전혀 없다”고 밝혔다. 그는 “위원회는 각 후보를 사람 자체의 공적에 따라 판단한다”고 덧붙였다.

미국 내 여론도 냉담하다. 워싱턴포스트가 여론조사 기관 입소스와 최근 미국 성인 2513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결과를 보면 미국인의 76%는 ‘트럼프 대통령이 노벨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답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노벨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답한 비율은 22%에 그쳤다.

올해도 트럼프의 수상 가능성은 작다는 게 대체적 관측이다.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25일 전문가들을 인용, “트럼프 대통령은 노벨위원회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국제 질서를 해체하고 있기 때문에 수상하지 못할 것”이라며 “위원회는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원조 삭감으로 더욱 어려워진 환경에서 활동하는 인도주의 단체를 부각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유엔난민기구(UNHCR)와 유엔아동기금(UNICEF) 등 유엔기구, 국경없는의사회 등 인도주의 단체가 노벨평화상 후보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트럼프의 노벨상 ‘챌린지’는 멈추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10년이 넘은 노벨상을 향한 질주가 올해 한번 좌절됐다고 멈출 리 없기 때문이다. 결국 임기 내내 노벨상 집착이 계속되고, 이를 위한 외교 ‘스펙쌓기’도 계속될 수 있다는 말이다. 트럼프가 내내 약속해온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이 새로운 ‘분쟁 해결’ 성과로 제출될 가능성도 크다.

워싱턴=임성수 특파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