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다르지만, 100년 한결 같이” 우을순 할머니 나눔 이야기

입력 2025-10-02 00:01
100세 우을순 할머니가 최근 경남 창원 자택에서 기자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우 할머니가 어린시절 직접 쓰고 엮은 찬송가 모음 책이다.

새벽 5시쯤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진주 목걸이를 맨다. 고리로 된 형태지만, 오랜 습관 덕분에 혼자서도 능숙하게 채운다. 이어 반지를 끼고, 시계를 찬 뒤 머리맡에 둔 성경을 읽는다. 침대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향해 양쪽에 가지런히 놓인 화초에 “잘 잤니?”하고 인사를 건넨다. 세수를 마치면 보행보조기(워커)에 몸을 지탱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1층으로 내려간다. 우편함에 꽂힌 신문을 챙겨 다시 7층으로 올라와 식탁에 앉아 돋보기를 쓰고 조간을 읽는다. 1925년생, 올해로 100세가 된 우을순 할머니의 아침 루틴이다. 최근 경남 창원의 자택에서 만난 우 할머니가 지켜내는 일상의 평범함은 경이로웠다. 귀가 어두워 인터뷰 내내 막내딸 최정미(65) 권사가 귀에 대고 소리를 높이긴 했지만, 할머니 자세는 꼿꼿하고 정정했다. 비결을 묻는 말에 우 할머니는 “무식한 내가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온 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웃었다. 최 권사는 “100세를 넘기시면서 쇠약해지는 속도가 하루하루 다르지만, 엄마는 100년을 한결같이 살아오셨다”고 덧붙였다.
우을순 할머니가 최근 경남 창원 자택에서 옛 성경을 읽는 장면.

우을순 할머니가 매일 아침 인사 나누는 화초들. 경남 창원 자택인 아파트 베란다에 있다.

백 년의 믿음과 나눔 실천

작은 평수 아파트에서 어머니를 9년째 모시는 최 권사 말대로 우 할머니는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백년을 살아냈다. 젊은 시절 아픈 남편과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남의 도움을 받아야 했을 때도 나눔을 멈추지 않았다. 2000년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 장기기증 희망 등록을 신청하고 지금껏 후원을 이어온 건 한 예다. 우 할머니는 “오래전 같은 교회를 다니던 청년이 신장병으로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장기 기증을 하고 싶었지만 가족들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해 마음에 남았다”며 “생면부지 타인에게 신장을 기증한 사연을 신문에서 접한 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관계자는 “지금보다 장기기증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을 당시 결심한 일을 지금껏 이어오시는 모습에 생명나눔을 향한 진심을 깊게 느낀다”고 말했다.

우 할머니는 대한성서공회에도 오랜 기간 기부해 왔다. 교회에서 나눠주는 쪽복음을 읽으며 신앙을 키워온 그에게 성경의 의미가 그만큼 특별해서다. 그는 “사도바울처럼 이방인에게 직접 전도하는 사람이 되진 못해도, 저처럼 성경이 없어 읽지 못하는 이들에게 작은 정성으로 보태 복음을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우을순 할머니 침대 머리맡에 놓인 책과 안경들.

없는 살림에도 주변을 둘러보며 산 우 할머니에게 나눔은 오히려 감사였다. “손은 움켜쥐기보다 펴야 하더라고요. 제 삶엔 무수한 굴곡이 있었어요. 그때마다 누군가가 마음을 나눠주고, 물질을 내어주었기에 여기까지 살아올 수 있었어요.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나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에요.”

성경 향한 배움 열망…필사만 5번
우 할머니는 성경을 비롯한 책을 읽고 싶어도 마음껏 읽을 수 없던 시절을 살았다. ‘여자가 공부하면 밥이나 태운다’는 인식 속에 학교 문턱도 넘지 못했다. 그러나 성경을 직접 읽고 싶다는 열망만큼은 꺾이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구해다 준 한자 성경을 읽기 위해 삼베를 실로 지으며 틈틈이 글을 익혔다. “매일 두세 글자씩 읽었는데, 일이나 하라고 핀잔을 자주 받았다”고 했다. 그래도 꿋꿋이, 2년에 걸쳐 성경에 나오는 한자를 모두 읽을 수 있게 됐다. 기자와 만난 날에도 우 할머니는 돋보기를 끼고 한자가 적힌 옛날 성경을 막힘없이 읽어 내려갔다. “저녁이 되면 호롱불을 켜고 할머니 계신 쪽을 검정 치마로 가린 채 성경을 읽었어요. 어느 날 바람이 세게 불어 초가집에 불이 날 뻔했죠. 그 뒤로 할머니의 잔소리도 잦아들었어요.(웃음)”
우을순 할머니의 16살 모습. 친구들과 교회 부흥회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우 할머니는 아랫줄 왼쪽 두번째 흰옷을 입은 소녀다. 가족 제공

우 할머니는 노트가 귀하던 시절, 커다란 미농지를 사서 작게 잘라 찬송가도 붓으로 직접 썼다. 지금도 그 찬송가를 보고 있다. 최 권사는 “너무 오래돼서 종이가 가루처럼 부서진다”며 안타까워했다.

우 할머니는 다섯 번에 걸쳐 성경 필사를 했다. 그렇게 손수 쓴 필사 노트는 자녀와 목회의 길을 걷는 손자에게 나눠줬다.
우을순 할머니가 직접 쓴 성경 필사 노트. 5번째 남긴 것으로 막내딸에게 주려고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세례 준 외국인 선교사, 하나님의 은혜”
우 할머니는 어린 시절을 보낸 울산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여섯 살 무렵이었다. 우 할머니는 “그 옛날, 그 산골에 외국인 선교사가 들어왔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고 했다. 울산의 월평교회를 다녔던 우 할머니는 호주 출신인 예원배(본명 Alber C Wright·1880~1971)선교사에게 15살에 세례를 받았다. 예 선교사는 1912년 한국에 입국해 30여년간 부산, 경남 지역을 중심으로 사역했다.

“선교사님은 한국어를 정말 잘하셨어요. 누가 성경을 읽으며 ‘가라대’라고 하면 ‘가라사대’라고 정확히 짚어주실 정도였어요. 제가 예 선교사님의 마지막 세례자래요.”

예 선교사는 일제강점기 동안 신사참배를 거부해 고난을 겪었고, 1942년 강제 추방당했다. 우 할머니는 결혼해 고향을 떠나면서 예 선교사를 다시 만나지 못한 게 지금껏 마음에 남는다. “예 선교사님과 함께 사역하던 여 선교사님이 제가 결혼한 경남 양산까지 오신 적이 있었다”며 “저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신 그들의 수고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 덕분에 힘든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다”고 했다.
우을순(왼쪽) 할머니의 젊은 시절 교회에서 찬양하는 모습. 가족 제공

고단한 삶 속 믿음 심었다
우 할머니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스무 살 갓 넘긴 남편과 이별했다. 큰딸을 낳기도 전 강제 징집으로 끌려간 것이다. 4년 동안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다행히 집으로 돌아왔지만, 집안을 일으켜보려 시작한 사업이 곧 어려움에 빠졌다. 그 무렵 심장병이 발병해 건강이 악화했고, 우 할머니는 가장이 됐다. 제주도로 가 타향살이하면서 도로포장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생계조차 버거운 시절이었지만, 여전히 교회 일을 최우선에 뒀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최 권사는 그런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교회에서 여자 장례가 생기면 엄마가 염도 하셨어요. 주방 봉사도 엄마 몫이었고요. 그걸 놓고 ‘그 집 엄마가 한 음식은 먹지도 말라’고 뒷말하는 사람도 있었지요. 그래도 굴하지 않으셨어요. 대학부 어머니회장 여전도회장 노년회장까지 맡고, 결국 그 교회(제주 성안교회)에서 권사임직을 받았어요.”
우을순 할머니가 제주 성안교회에서 권사 임직을 받을 때 모습. 가족 제공

최 권사를 이해시킨 건 결국 ‘사랑’이었다. 새벽기도를 거르지 않던 우 할머니는 어스름한 새벽, 교회로 향하며 자는 아이들 이마에 입을 맞추고 “사랑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최 권사는 “그때 엄마의 온기가 아직도 기억난다”며 “모든 형제가 삐뚤어지지 않고, 믿음 안에서 자랄 수 있었던 건 그런 매일의 기도와 사랑 덕분”이라고 했다. 우 할머니의 3남 3녀 자녀들은 권사, 장로로서 신앙의 유산을 이어가고 있다. 최 권사는 교회 장애인 부서인 사랑부 교사로 헌신하고 있다.
우을순 할머니가 성경을 읽는 모습을 딸인 최정미 권사가 지켜보고 있다.

기도로 물려준 신앙, 세대를 잇다
우 할머니 손자인 최진혁(35) 전도사는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교회는 물론 길을 걸을 때, 골방에 계실 적에도 할머니 기도와 찬양은 끊이질 않았다”며 “할머니는 예배자의 삶을 사셨다”고 말했다. 최 전도사는 대전의 은혜의항해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다. 최 전도사는 “할머니를 떠올리면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한 성경 인물 에녹이 생각난다”고 했다.
기자와 2시간 가량 인터뷰를 마친 뒤 방에서 쉬는 우을순 할머니의 모습. 한참을 누워서 성경을 읽었다.

우 할머니는 손자가 목회자의 길을 걷길 간절히 기도해 왔지만 한 번도 직접 내색한 적은 없었다. 그저 방에서 성경을 필사하고, 손주를 업을 때마다 찬양을 흥얼거릴 뿐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할머니와 따로 살게 된 최 전도사는 청소년 캠프에 다녀온 뒤 목회자가 되겠다고 결심했고, 그 꿈을 먼저 어머니에게 털어놓았다. “할머니가 아시면 정말 기뻐하시겠다”는 어머니 말에 곧장 할머니에게 전화했고, 우 할머니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며 한참을 울먹거렸다.
우을순 할머니가 최근 경남 창원 자택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는 모습. 온라인 영상을 보면서 말씀을 적고 있다. 가족 제공

우을순 할머니가 온라인 영상 예배를 드리면서 적은 묵상들.

최 전도사는 내년 4월 태어날 쌍둥이에게 할머니로부터 이어진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려 한다.

“할머니는 힘들 때나 기쁠 때나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항상 하나님만 바라보셨어요. 세상 기준으로 결코 행복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매 순간 감사하며 행복해 하셨어요. 어린 제 눈에도 그 모습이 분명히 보였습니다. 제 아이들도 물질적 성공만을 좇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자체에서 기쁨을 누리길 바랍니다. 우리 할머니처럼요.”
우을순 할머니가 쪽복음을 묶어 목회자의 길을 걷는 손자에게 준 성경책. 가족 제공

창원=글·사진 신은정 기자 se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