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G는 너무 무기력하다. 시험이 다가와도 책을 들여다보지를 않는다. 누워서 휴대전화만 뒤적이고 있다. 그런데 G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도 굉장히 성실했다. 공부도 전교에서 1, 2 등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무기력에 빠졌다. 현재 표정이나 행동을 보았을 때 G는 몹시 우울한 상태였다. 스스로는 어떤 감정도 호소하지 못했다. 청소년의 경우 ‘우울하다, 슬프다, 외롭다’ 등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G의 경우는 극단적이었다.
G는 “형과 아빠가 분노조절 장애예요. 형과 아빠가 매일 화를 폭발하고 서로 싸웠어요. 칼을 들거나 물건을 들고 죽일 듯이 서로 공격해요. 저나 엄마한테도 그런 적이 많지만 둘이 맞붙는 날이 많았어요”라고 말하면서도 G는 무표정하다.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순간순간이 트라우마인 상황에서 감정을 느끼게 된다면 너무 고통스러우니 스스로 감정을 차단해 버리는 경우를 간혹 본다. 감정을 회피해야 살 수 있다고 느낀다. G도 그런 경우였다.
우선 G에게는 감정을 알아차리고,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영화나 드라마 클립을 보면서 그때 느끼는 감정을 인지하는 연습을 해볼 수 있다. 초보적인 단계에선 ‘인사이드 아웃’과 같은 애니메이션을 활용하는 것도 좋다. 그리고 긍정적인 감정뿐 아니고 부정적인 감정도 자신의 일부이다. 감정에 대해서 ‘좋다, 나쁘다’ 등의 평가 없이 받아들이도록 도와준다. 특히 슬픔과 기쁨이 충돌하는 장면이나 기쁨과 슬픔이 혼재하는 장면, 기쁨이 슬픔으로 전환되는 장면에 주목한다. 인물의 말뿐 아니라 표정과 몸짓, 목소리 톤과 속도를 관찰한다. 그러면서 어떤 감정으로 느끼고 있는지 어느 순간에 감정의 변화를 느끼는지, 자신이 등장인물이었다면 어떻게 그 감정을 표현할까 등을 함께 이야기해 본다. 차츰 실사 영화를 중심으로 전환해 보고 대사 없는 장면에서 복합적인 감정이 느끼는 장면으로도 발전시켜 본다.
이런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를 통한 연습을 마친 후에는 눈을 감고 최근에 있었던 덜 고통스러운 기억부터 시작해서 상황을 기억해 낼 수 있게 해본다. 그 당시의 이미지를 가능한 한 생생하게 마음속으로 그리면서 거기에 머문다.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 순간 어떤 감각과 느낌이 드는지, 그것이 당신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게 하는지를 관찰하게 한다. 눈을 뜨고 이때 떠오른 반응을 이야기해 본다. 감정의 여러 요소 들을 인식하고 단어로 표현하도록 도와준다. 차츰 감정으로 디테일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필요할 때는 감정 색인 카드(다양한 감정의 표현하는 단어로 만든 카드)를 참고하도록 해도 좋다. 그리고 또 다른 고통스러운 상황을 기억해 내도록 한 다음 과정을 반복한다.
이렇게 하다 보면 차츰 감정에 대해서 느끼고 언어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워나간다. G는 차츰 자신이 회피하기 위해 써왔던 방법들이 무용할 뿐 아니라 자신에게 해를 주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호분(연세누리 정신과 원장,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