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는 유모차가 없어서 아이들과 함께 집에 고립되는 부모들이 있다. 이른둥이(미숙아)로 태어나 뇌 손상을 입고 생존한 아이들을 키우는 가정이다. 대부분의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한 유모차에 기저귀 가방과 장난감을 실을 때, 이들은 10㎏짜리 인공호흡기를 먼저 싣는다. 가래를 뽑아내는 석션기, 심박수와 산소포화도를 확인하는 모니터까지 싣고 나면, 유모차는 ‘움직이는 응급실’이 된다.
하지만 아이의 몸이 자라면서 이 가정은 그 누구도 고민하지 못했던 난관에 맞닿뜨린다. 아무리 큰 유모차도 몸에 맞지않고, 몸을 눕힐 수 없는 휠체어는 선택지가 되지 못한다. 900만원짜리 맞춤형 휠체어 견적을 받아봐도, 25㎏에 달하는 무게에 좌절한다. 결국 왕복 20만원이 드는 사설 구급차에 의존해 겨우 정기적인 병원 진료만 받을 수밖에 없다. 고립된 삶으로 내몰리는 것이다.
한 엄마의 결심, 중증장애 아이와 부모들 희망이 됐다
다섯 살 딸 하랑이의 몸이 더이상 유모차에 맞지 않게 되자, 어머니 예수아(35)씨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직접 나섰다. 예씨는 30일 경기도 고양시 자택에서 딸 하랑이와 함께 국민일보를 만나 “딸의 키가 유모차 길이 90㎝를 넘어서자, 유모차 프레임에 아이의 팔뚝이 쓸려 빨갛게 부어올랐다”며 “외출이 이제는 아이에게 힘든 일이 돼버렸다”고 했다.
‘이 고통이 우리 가족만의 문제일까?’ 답을 찾기 위해 예씨가 직접 만든 온라인 설문조사에, 최근 98개 가정이 응답했다. 설문에 나타난 아이들 진단명은 다양했다. 저산소성 뇌 손상뿐 아니라 요소회로 대사장애, 당화장애 같은 희귀질환부터 염색체 이상, 뇌염 후유증을 앓았다. 진단명은 제각각이었지만, 이들이 겪는 어려움은 한결 같았다. 응답자의 90.6%가 현재 이동 보조기구에 불만족했다. 답변에는 ‘너무 무겁고’, ‘차에 싣기 힘들다’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가득했다. 한 부모는 “기존 유모차는 5세 정도까지만 사용 가능하고, 휠체어는 부피도 크고 무거워서 트렁크가 꽉 찬다”고 토로했다.
예씨는 “저는 누워있는 아이들만 생각했는데, 휠체어에 앉아서 생활하는 아이를 둔 부모님들도 더 큰 사이즈의 유모차를 간절히 원했다”며 “밖에 나가면 아이들 기저귀를 갈 곳이 마땅치 않은데, 잠시라도 눕힐 수 있는 유모차가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고 전했다. 그렇게 98개 가정의 절박한 목소리가 모여, 세상에 없던 유모차가 갖춰야 할 모습이 하나씩 그려졌다.
“똑똑”... 한 엄마의 간절한 두드림에 열린 문
하랑이 어머니는 ‘세상에 없는 유모차’를 직접 만들기로 했다. 같은 처지의 가정들의 목소리를 모아 국내 유모차 기업 ‘와이업’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유모차 제작 금형을 보유하고 있는 이 업체가 초기 시제품 개발비 3000만원을 전액 부담해 유모차 제작에 직접 나서기로 했다. 유모차의 이름은 ‘하랑이’로 결정됐다. 세상에 없던 이 유모차는 키 110㎝ 아이도 누울 수 있도록 시트 길이를 늘리면서 시중 유모차 중 가장 큰 사이즈가 될 예정이다. 의료장비를 위한 넓은 수납공간과 링거거치대 등 편의장비를 갖추면서도, 10㎏ 이하로 휴대성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다.
와이업 관계자는 “저도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되보니, 유모차가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하는 매개체라는 걸 알게 됐다”며 “그걸 당연하게 쓰지 못한다는 게 마음 아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프로젝트로 우리만의 유모차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걸 보여주고 싶다”며 “추후 수익금이 발생한다면 하랑이처럼 힘든 아이들을 위해 기부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예씨에겐 아직 최소 수량 200대의 제작비용 3억원을 확보하는 일이 과제로 남았다. 유모차는 이윤을 붙이지 않은 원가 150만원 선으로, 선주문 후원을 받아 제작할 계획이다. 예씨는 “여러 기업이나 재단을 통해 모금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어 고민이 많다”며 “도움의 손길이 모여 특수 유모차가 필요한 가정에 전달하고, 지원받지 못하는 가정도 최소한의 비용으로 구매할 수 있는 길을 열고 싶다”고 밝혔다.
“내가 너를 살린 걸, 용서할 수 있겠니?”
하랑이는 2021년 12월, 크리스마스에 태어날 예정이었지만 같은 해 10월, 10주나 이른 30주 만에 세상에 나왔다. 1.46㎏. 신생아 평균 몸무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콜라 페트병보다도 조금 작은 아이였다. 울음도 움직임도 없었다. 출산 과정에서 병원은 태동 검사의 이상 신호를 놓쳤고, 상급 병원 이송 후에는 30분 가량 산소 공급을 위한 기도 삽관이 늦어졌다. 아이의 뇌는 회복하기 힘든 손상을 입었다. 부부는 아이의 장례까지 준비했다. “아이가 스스로 떠나지 않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생명을 끊나” 예씨는 이런 아버지의 한마디에 마음을 다잡았다.하랑이가 1년 4개월의 긴 병원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오면서 무거운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예씨는 “산소포화도가 떨어질 때면 자주 응급실에 가야했다. 사실 언제 우리 곁을 떠나도 이상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으면서 견뎌야했다”며 “침을 삼키지 못하니까 새벽에 한두 시간 간격으로 일어나 아이의 침을 계속 뽑아줘야 했다”고 설명했다. 몸에 힘을 주고 있는 아이의 기저귀 한 번 가는 데 40분이 걸렸고,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됐다. 신생아 중환자실 비용부터 재활치료, 특수분유, 각종 의료 소품비까지 4년간 들인 비용은 8000여만원에 달했다.
부부는 인고의 시간 속에서 하랑이와 새로운 소통 방식을 배웠다. 예씨는 “하랑이가 말하거나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저희는 호흡과 맥박수로 하랑이 기분을 안다”며 “기저귀가 많이 찼을 때 불편하면 호흡이 가빠지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면 심박수가 편안하게 내려간다. 그럴 때 ‘아이가 좋아하는구나’ 하고 이해한다”고 전했다.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게 되자, 부부는 하랑이에게 더 많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고된 시간 속에서 예씨는 생명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물어야 했다. 그는 “최근에 어떤 글을 봤는데, 제목이 ‘내가 너를 살린 걸 용서할 수 있겠니?’였다. 그걸 보고 감정이입이 됐다”며 “저는 하랑이랑 함께 사는 게 너무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랑이도 그렇게 생각할 지 모르겠다. 그러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사랑, 베푸는 사랑으로
결코 쉽지 않은 일을 시작할 수 있었던 건 하랑이를 통해 깊어진 신앙 덕분이었다. 경기 고양 일산제일교회에 출석하는 예씨는 하랑이가 태어나기 전과 후의 신앙이 완전히 다르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전에도 신앙에 따라 나누는 삶을 살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삶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에 의한 거였다”며 “하나님께 내가 받은 복에 대한 감사함이 더해진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예씨는 아이의 고통 앞에서 원망 대신 감사를 배우게 됐다. 그는 “사람들이 아이가 아픈데 원망스럽지 않냐고 묻지만, 원망한 적은 없다”며 “하랑이가 아프고 나서야 완전하게 하나님께 엎드렸다. 주시는 분도, 낫게 해주실 분도 하나님이니까. 수많은 것을 주셨는데, 아이가 아프다는 한 가지 이유로 하나님을 원망할 수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예씨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라는 뜻으로 딸의 이름을 하랑이라고 지었다. 그는 “하랑이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지어준 이름인데, 오히려 저희가 하랑이를 통해 이렇게 큰 사랑을 받을 줄은 몰랐다”며 “원래는 사랑을 ‘받으라’는 뜻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은 ‘베푸는’ 사랑이 진짜라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고양=글·사진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