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원석 개인전, 버려진 공간을 예술로 채우다

입력 2025-09-30 09:15 수정 2025-09-30 10:17
부산 동일고무벨트 동래공장에 설치된 폐지관 작품.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울림이 발생한다. 한원석 작가 제공

부산의 산업유산인 동일고무벨트 공장이 예술 무대로 다시 태어난다. 한원석 작가의 개인전 ‘지각의 경계 : 검은 구멍 속 사유’가 다음 달 17일부터 11월 16일까지 한 달간 부산 동래 동일고무벨트 공장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설치미술, 사운드, 퍼포먼스, 증강현실(AR)까지 결합한 다원예술 프로젝트로, 광복 이후 80년간 부산이 걸어온 산업화와 기억의 궤적을 동시대적 언어로 재해석한다. 특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선정작으로 국내 다원예술 전시 가운데 최대 규모의 지원을 받는 만큼 전시의 의미와 상징성은 남다르다.

한원석 작가 개인전 ‘지각의 경계 : 검은 구멍 속 사유’ 전시장 전경. 버려진 산업공간이 예술의 무대로 변신했다. 한원석 작가 제공

◆ 버려진 산업공간, 예술의 울림으로
전시가 열리는 동일고무벨트 동래공장은 1650㎡에 달하는 대형 산업공간이다. 오랜 기간 부산 산업화를 상징하다 가동을 멈춘 이 공장은 이번 전시에서 거대한 울림통으로 다시 태어난다. 전시장에는 직경 94㎜부터 431㎜까지 다양한 크기의 폐지관 100여개가 설치된다. 이 지관(紙管·종이파이프) 안에는 스피커가 내장돼 관람객의 움직임에 반응해 소리를 낸다. 관객이 다가서면 공명음이 울려 퍼지고, 멀어지면 다시 침묵으로 돌아간다.

각 지관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동일고무벨트 공장에서 실제 생산되던 고무벨트의 주파수와 회전 속도를 바탕으로 설계됐다. 과거 산업현장의 리듬이 예술적 음향으로 변주돼 부산 산업화의 기억을 오늘날 감각으로 소환한다. 한 작가는 이를 “사라진 노동의 소리, 버려진 공간의 기억을 다시 울리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광복 직후 부산 산업화를 이끌었던 동일고무벨트 동래공장(좌). 현재는 가동을 멈추고 한원석 작가의 전시 공간으로 다시 쓰이고 있다(우). 한원석 작가 제공

1층이 폐지관 설치 작업이라면, 2층에서는 AR을 활용한 급진적 실험이 관람객을 맞는다. 증강현실 기기를 착용하면 실제 바닥에 ‘검은 구멍’이 열리는 듯한 착시가 구현된다. 물리적 공간과 가상 공간, 실재와 환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체험은 관람객에게 ‘지각의 경계’라는 전시 주제를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한 작가는 이번 전시에 대해 “검은 구멍은 자기 고백이자 제안이다. 이곳에서 울려 퍼지는 공명에 당신을 초대한다. 울리는 공간 속에서 당신의 결핍이 나의 결핍과 마주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가 언급한 ‘공명’은 단순히 물리적 울림을 뜻하지 않는다. 관계의 잔해, 시대적 상처, 개인이 가진 결핍까지 담아내는 사회적·정서적 울림이란 해석이다.

특히 이번 전시는 단순히 장소 특정적(site-specific) 설치 작업을 넘어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획자 김최은영 예술감독은 “다원예술의 확장성이 도시 공간을 어떻게 채우고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며 “예술이 산업유산과 결합해 새로운 도시적 경험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전시 ‘지각의 경계 : 검은 구멍 속 사유’를 준비한 한원석 작가. “검은 구멍은 자기 고백이자 제안이다”라고 말한다. 한원석 작가 제공

◆ 버려진 것을 예술로 되살리다
부산 출신의 한원석 작가는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설치미술가다. 그의 작품 세계는 ‘폐기와 재생’으로 요약된다. 쓰레기와 산업 폐기물을 모아 새로운 예술로 환생시키는 작업을 이어왔다.

2008년 부산비엔날레에서 공개한 대표작 ‘형연’은 폐스피커 3650개로 만든 거대한 성덕대왕신종이다. 현재 경북도청 인근 원당지 공원에 전시 중이며 지난해 부산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문화산업 고위급 대화 만찬 자리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작품으로 해외 귀빈들에게 소개됐다.

또 다른 대표작 ‘환생’은 폐헤드라이트 1450개를 쌓아 만든 첨성대 설치물로, 런던시청 초청전시를 비롯해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부산국제영화제와 부산은행의 후원으로 제작한 ‘도경’은 국제시장 원도심의 상징물이 됐으며 쌍용양회의 폐사일로 조각으로 제작한 ‘달의 창’은 부산 근현대사의 상징적 예술작품으로 사랑받고 있다.

한 작가는 환경디자인을 전공해 첼시예술대학원을 우수 장학생으로 졸업했고, 도쿄대 건축학 박사과정, 칭화대 학술교류를 통해 건축과 미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이어왔다. 2002년 베이징 따산즈798 예술구에서 한국 최초의 문화공간 ‘이음’을 개관한 경험을 바탕으로, 부산 초량동 산복도로에 실험적 갤러리를 조성해 세계디자인수도(WDC) 실사단 방문 시 가장 인상 깊은 장소로 꼽히기도 했다.

한원석 작가가 동일고무벨트 공장에서 준비한 전시회. 소리와 빛, 감각이 교차하는 공간을 연출했다. 한원석 작가 제공

◆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다
‘지각의 경계’는 버려진 것과 소외된 것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온 그의 궤적을 집약한 전시다. 지관 설치물은 관람객과 끊임없이 연결되고 해체되며 소리와 침묵, 존재와 부재의 경계를 드러낸다. 김최은영 예술감독은 “개인의 정체성을 고착시키는 기존 질서를 해체하고, 예측 불가능한 다중적 경험을 열어젖히는 작업”이라고 평가했다.

한 작가는 지금까지 버려진 폐기물과 기억을 되살리는 ‘Re:’ 연작을 이어왔으며, 이번에는 시각을 넘어 소리·냄새·촉각으로 영역을 넓혔다. 관객이 공간 속 울림을 듣고 감각을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결핍과 상처를 새로운 예술적 경험으로 전환하고자 했다. 그는 “나는 늘 경계 위에 서 있었고, 소속되지 못한 채 떠돌며 정착하지 못했다. 검은 구멍은 나의 결핍과 상처가 응집된 덩어리지만, 그 속에서 희망을 봤다”고 말했다.

전시는 매일 정오부터 오후 7시까지 운영되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관람은 무료다. 특히 이번 전시는 부산 전역에서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는 ‘페스티벌 시월’ 기간에 맞춰 진행돼 시민들에게 풍성한 문화예술 경험을 선사할 예정이다.

부산=윤일선 기자 news828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