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윤상의 세상만사] 위험한 호의

입력 2025-09-28 19:17

그는 나름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해 닥치는 대로 일해서 돈을 모았다. 그 돈으로 허름한 창고를 인수해서 컨테이너로 만든 창고를 대폭 늘려 창고업을 시작했는데, 이게 그를 부자로 만들어 주었다. 매달 들어오는 현금은 그의 가족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남는 돈을 잘 모아서 아이들 결혼시키고 집까지 장만해 주었는데도 여전히 돈이 넘쳤다.

이때부터다. 그가 지인의 손에 이끌려 골프를 시작한 것이. 골프는 그에게 신세계였다. 그는 일주일에 서너 번씩 골프장에 나갔다. 그가 골프에 빠졌다고 해도 창고는 순조롭게 돌아갔고, 매달 어김없이 돈이 들어와서 일주일에 몇 번씩 골프장에 나가도 경제적으로 부담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일상화된 내기골프에서 몇백만원씩 잃기도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여전히 창고에서는 화수분처럼 돈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골프장에서 만난 인연으로 인해 이렇게 곤란을 겪을 줄 누가 알았으랴. 골프장에 몇 번 동반한 A씨는 장학회 이사장이자 회사의 회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정치권과 연예계 쪽으로 인맥이 넓다고 자랑하였다. A씨에게 받은 명함에도 그 직함이 박혀있었다. A씨는 그를 치켜세우며 잡지의 표지 모델도 시켜주고, 자신이 주도하는 단체에 그를 추천하여 상을 주기도 하는 등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척 노력했다.

이쯤 되자 A씨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A씨는 그에게 몇십만원 또는 몇백만원씩 돈을 빌리면서도 어김없이 변제기 전에 미리 갚았고, 때로는 골프장에서 그의 골프비용을 내주기도 하여 그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었다. 그는 골프에 빠지듯이 A씨에게 빠졌다. 그는 A씨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A씨가 자기가 추천하면 몽골 정부에서 수여하는 훈장을 받을 수 있는데, 그를 추천할 테니 몽골에 함께 가서 골프도 맘껏 치고 훈장도 받으라고 제안하였다. 다만, 훈장 대가로 몽골 정부에 1000만원을 줘야 한다고 해서 A씨의 계좌로 그 돈을 보냈다. 그는 A씨와 그의 지인으로 보이는 여러 사람과 함께 몽골에 가서 매일 골프를 쳤고 마지막 날 밤에는 호텔에서 어느 몽골인으로부터 조잡하게 만들어진 훈장을 받았다. 실제로 몽골 정부가 주는 훈장일 리는 없겠지만.

몽골에 다녀온 후, A씨는 적극적으로 그에게 자신이 진행하고 있는 사업에 투자를 권유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테마파크 사업을 하고 있는데, 현재는 임야에 불과하지만, 시에서 허가만 나오면 땅값이 몇백 배 뛸 테니 50억원만 투자하면 최소 500억원은 벌게 해 주겠다고. 그는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었는데도 부족하여 창고부지를 담보로 맡기고 돈을 빌려서 마련한 50억원을 A씨에게 건넸다.

그로부터 한참 뒤, A씨로부터 사기를 당한 다른 피해자의 연락을 받으면서 그도 사기를 당했음을 직감적으로 자각하게 되었다. 몇백 배가 된다던 테마파크 부지는 이미 강제경매로 넘어갔고, 언제부턴가 연락이 끊긴 A씨는 다른 피해자들 사건으로 벌써 구속되어 재판받고 있었다. 그가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50억원은 한 푼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 인생을 하나씩 정리해 나갈 나이인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가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거실로 나와서 중얼거린다. 집이라고 편안하기는커녕 오히려 바늘방석이다. 아내와 각방을 쓴 지 오래됐고, 자식들도 그를 원망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 같다. 오늘은 친구들과 위로 골프를 치기로 한 날이다. 그는 골프라도 쳐야 울화병에서 벗어날 것 같다고 생각하며 다시 잠을 청한다.

*외부 필자의 기고 및 칼럼은 국민일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엄윤상(법무법인 드림)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