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오전 광주국제양궁장. 3177평(1만500㎡) 규모의 경기장에 과녁들이 길게 늘어서고, 전광판의 샷 클락(shot clock)이 긴장감을 더한다. 숨죽인 관중 앞에서 활시위가 ‘팅’ 하고 울린다. 시각장애인 선수들은 30m 떨어진 과녁을 향해 한 세트 240초(4분) 안에 6발씩, 총 12세트 72발을 쏘는 예선 규정에 따라 차분히 활을 당겼다. 그 결과 국내 최초로 세계선수권 무대에 오른 세 명의 선수 중 무려 두 명이 동메달 결정전에 진출하며 감격스러운 역사를 썼다.
시각장애인 양궁은 비장애인 양궁과 달리 ‘감각의 경기’다. 선수들은 손등의 촉각을 이용해 지상에 고정된 조준틀로 활을 겨눈다. 활에 달린 조준기는 없고, 선수 앞에는 조준틀이, 뒤에는 자세와 방향을 알려주는 스포터(spotter)가 선다. “16시 8.” 스포터의 이 짧은 말은 “4시 방향, 8점 과녁 위치”라는 뜻이다. 스포터는 방향을 잡아주고 결과를 곧바로 알려주는 선수들의 ‘눈’이자 경기 파트너다.
세계양궁연맹(WA)·광주광역시 주최 세계장애인양궁선수권대회에서 시각장애인 종목은 8개국에서 16명의 시각장애인 선수가 참가했다. 첫 도전임에도 한국 선수들은 예선을 통과하고 토너먼트에서 준결승까지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
시각장애인 양궁은 국제시각장애인스포츠연맹(IBSA)에서 공인 VI(Visual Impairment) 종목으로 시력 정도에 따라 V1(전맹), V2(단안 시야 5도 미만), V3(단안 시야 20도 미만)로 등급이 나뉜다. 이날 V1 등급으로 준결승에 오른 조종석(48)씨는 “시각장애인이 활을 쏜다고 하면 의아한 시선이 많았는데 세계무대에서 결실을 맺으니 감격스럽다”며 “이번 성과를 계기로 연습장과 대회 기회가 늘어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 다른 준결승 진출자 V2 등급의 김성민(48)씨는 “스포터로 섬겨주신 이태희 타겟28 대표와 그 가족들 덕분에 훈련을 이어올 수 있었다. 변함없는 배려가 큰 힘이 됐다”고 고백했다.
V3 등급으로 함께 출전한 최은주(52)씨와 스포터이자 친오빠 최명규(57)씨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최씨는 “동생이 매주 토요일마다 빠짐없이 훈련한 게 대견하다”며 “이 자리를 지킨 것만으로 벅차서 울컥했다”고 말했다. 최씨도 “오빠가 함께하니 안정감 있고 믿음직스럽다. 가족이기에 더 편하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이날 출전 선수들은 모두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양궁 동호회 출신이다. 국내 시각장애인 양궁은 2016년 실로암복지관(관장 김미경)과 석동은(70) 감독이 개설한 양궁 강좌에서 시작됐다. 초기엔 체험 프로그램에 불과했으나, 선수들의 열정과 석 감독의 체계적 훈련으로 현재 전국 선수 30여명 규모 동호회로 성장했다.
아버지의 길을 따라간 스포츠 선교사
석 감독은 한국 양궁의 개척자이자 ‘한국 양궁의 대부’로 불리는 석봉근씨의 장남이다“아버지는 체육 교사로 근무하시며 늘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 예수님처럼 섬기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자라 저 역시 스포츠 선교를 비전으로 삼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1960년대 상이용사촌에서 지체장애인에게 활쏘기를 가르쳤고, 1971년 척수 장애 간호장교 출신 조금임 선수를 세계신체장애자대회에 처음 출전시켜 금메달을 따게 했다.
석 감독 역시 아버지의 지도로 한국 양궁 초창기 선수로 활약하다 이후 감독으로 활동했다. 2004년 이탈리아 양궁팀을 맡아 금메달을 따고, 영국팀 지도 요청을 받고 기도 끝에 5년간 영국에서 선수들을 지도했다. 이후 이탈리아팀 재요청을 받아 다시 지도한 끝에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이끌었고, 2013년에는 말라위로 가 1년간 스포츠 선교에 헌신했다.
“기도만이 길이였습니다”
석 감독은 국내 시각장애인 양궁팀을 이끌며 훈련장 부족이라는 난관을 6년간 겪었다. 첫 연습장은 복지관 8층 실내체육관으로 사격 거리가 3m에 불과했다. 유리 사고로 연습장이 지하 복도로 옮겨지기도 했고, 파주의 돼지 축사와 양재의 비닐하우스를 전전했다. 여름에는 38도 더위 속 환풍기로, 겨울에는 난로와 핫팩으로 버텼다. 계속해서 실내양궁장을 찾아다닌 석 감독의 노력으로 3년 전부터는 경기도 양주의 실내 양궁장에서 28m 거리 실전 훈련이 가능해졌다. 석 감독은 “그때마다 기도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하나님이 장소와 도움의 손길을 연결해주셨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국내 시각장애인 양궁은 여전히 전국체전에서 정식 종목이 아닌 시범 종목에 머물러 있다. 선수 수 부족, 대한장애인양궁협회 내 관련 규정 미비 및 등급 분류 시스템 부재 등의 이유에서다. 다행히 올해는 ㈔한국시각장애인스포츠연맹(회장 강윤택)의 지원으로 출전이 가능했다. 석 감독은 “시각장애인 양궁을 국내에 널리 알리는 것이 목표”라며 “9년간 시각장애인들과 양궁을 해오며 그들이 자신감을 되찾는 모습을 지켜봤다. ‘보이지 않아도 과녁을 맞힐 수 있다’는 경험은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3년간 함께 훈련했던 김우림씨를 떠올리며 목소리를 떨었다.
“교회와 직장에서 늘 성실하던 우림이는 토요일마다 지친 몸을 이끌고도 활을 쏠 땐 가장 밝게 웃던 친구였습니다. 지난해 갑자기 심장마비로 33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오늘 경기를 하늘에서 보고 있을 거라 믿습니다. 우림아, 네 웃음과 열정이 여기까지 우리를 데려왔다. 너도 함께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고 믿으며, 끝까지 힘껏 쏘겠다.”
동메달 결정전을 포함한 결승전은 27일 오전 광주 동구 5·18민주광장에서 열릴 예정이다.
광주=글·사진 김수연 기자 pro111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