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한국 측에 대미 투자 금액을 7월 구두 합의에 따른 3500억 달러(493조원)에서 더 늘리라고 압박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한국은 3500억 달러를 현금으로 투자하는 것에 난색을 표하고 있지만 러트닉 장관은 현금 제공 비율을 높이라고 강경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WSJ는 한·미 무역협상에 정통한 관계자들을 인용해 최근 대미 투자 쟁점을 둘러싼 양측 간 무역협상 상황을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러트닉 장관은 비공개 무역협상 자리에서 한국 관계자들에게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의 대미 투자 자금 중 대출이 아닌 현금으로 제공되는 비율이 더 높아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 러트닉은 한국의 대미 투자액을 약간 더 증액해 일본의 대미 투자액인 5500억 달러(775조원)에 조금 더 근접하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러트닉은 일본 측이 서명한 대미 투자합의와 유사한 조건들을 한국이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도 분명히 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과 일본이 지난 4일 타결한 양해각서(MOU)에 따르면 일본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투자처를 선정해 통보하면 45영업일 안에 미국이 지정하는 계좌에 즉시 사용 가능한 달러화를 납입해야 한다. 사실상 ‘백지수표 투자’를 요구한 것인데 한국에도 이 같은 조건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러트닉의 이 같은 강경 입장에 일부 한국 측 관계자들은 백악관이 ‘골대를 움직이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고 WSJ는 전했다.
한국과의 협상을 포함해 미국이 진행 중인 상당수의 무역협상은 서면 합의된 것이 아니라 구두 합의만 한 상황에서 세부 조율이 진행되고 있다. 결국 트럼프 행정부와 한국과의 무역합의가 어떻게 이뤄지는지가 미국이 수십개 국가들과 진행 중인 관세 협상을 평가할 잣대가 될 것이라고 WSJ는 전했다. 한 백악관 관계자는 WSJ에 미국이 한국과의 무역합의에 미세조정을 진행 중이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이미 합의된 내용에서 “드라마틱하게 벗어난 것을 요구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WSJ는 “미국이 한국과 협상을 타결할 수 있다면 다른 나라들과 협상을 타결할 수 있는 모멘텀이 될 수 있다”며 “만약 미국이 한국과의 타결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다른 국가들은 서둘러 협상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줄어들 것”이라고 전했다.
한국과 미국의 협상이 진통을 겪는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은 25일(현지시간) 한·미 무역 합의에 따라 한국이 투자해야 할 금액이 3500억 달러라는 점을 재확인하면서 “그것은 선불(up front)”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중국 동영상 플랫폼 틱톡 합의와 관련한 행정명령에 서명한 후 “우리는 다른 나라들로부터 결코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지만 이제는 잘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트럼프는 “관세와 무역 합의 덕분에 한 사례에서는 9500억 달러(유럽연합)를 확보하게 됐는데, 이전에는 전혀 지불하지 않던 금액”이라며 “아시다시피 일본에서는 5500억달러, 한국에서는 3500억달러를 받는다. 이것은 선불”이라고 밝혔다. 트럼프가 ‘선불’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투자금 지불이 관세 인하의 전제 조건임을 강조하기 위한 차원으로 풀이된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