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과 좌절의 시기를 겪지 않은 프로 골퍼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것을 효과적으로 극복하지 못하면 투어 활동을 일찍 접어야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오히려 더 단단해진 모습으로 돌아와 오래오래 팬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한국프로골프(KPGA)투어의 대표적 ‘언더독’ 박성국(37·엘앤씨바이오)은 후자 사례를 상징하는 선수다. 그는 지난 21일 경북 구미시 골프존카운티 선산CC에서 끝난 KPGA투어 골프존 오픈에 ‘리랭킹’으로 출전, 덜컥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투어를 대표하는 쟁쟁한 선수들을 꺾고 정상에 우뚝 섰다는 점에서 ‘언더독의 대반란’이었다.
KPGA투어 리랭킹은 2007년에 처음 도입됐다. KPGA투어 카테고리 20번(전년도 KPGA 챌린지투어 통합순위 2위~10위)부터 23번(QT 본선진출자)을 대상으로 상반기 제네시스 포인트 순위에 따라 하반기 시드 순위를 재조정하는 제도다.
풀 시드가 없더라도 어렵게 출전 기회를 잡아 좋은 성적을 내는 선수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돌아가도록 하자는 게 도입 취지다. 미국프로골프(PGA)투어, DP월드투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아시안투어,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투어가 이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박성국은 골프존 오픈에서 우승하지 않았더라면 올 시즌 남은 6개 대회 중 2개 대회만 출전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벼랑 끝에 몰린 심정으로 출전한 대회에서 7년여 만에 통산 2승째를 거둔 덕에 이제는 남은 모든 대회 출전이 가능해졌다.
제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밝고 유쾌했던 그가 우승 직후 가진 인터뷰 때 참았던 눈물을 쏟아낸 것도 혼자서 삭여야만 했던 지난날의 마음고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말 힘든 시기를 보냈다. 도중에 골프를 그만둘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골프 외에는 할 것이 없었다. 아내와 6살짜리 딸(규빈)을 생각하면서 정말 열심히 했다. 고생했던 가족들을 생각하니까 눈물이 났다”라며 “좋아했던 것은 안 하고 힘들 게 꼭 해야 할 것들은 조금 더 많이 하려 했던 게 우승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2007년에 KPGA투어에 데뷔한 박성국은 작년에 처음으로 시드를 잃었다. 통산 1승(2018년 현대해상 최경주 인비테이셔널)으로 절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시드 유지 걱정만은 하지 않았기에 그 충격파는 컸다. 마음을 다잡고 시드전을 통해 재입성을 노렸지만 그 또한 여의치 않았다.
그런 그에게 정신이 번쩍 들게 한 사건이 있었다. 한솥밥 식구이자 친한 후배인 이대한(34·엘앤씨바이오)이 작년 투어 챔피언십에서 생애 첫 승을 거둔 것이었다.
박성국은 “첫 우승 이후에도 수차례 우승 기회가 있었는데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너무 편안하게만 치려고 했던 것 같다”고 그간의 실패 원인을 분석한 뒤 “작년 투어 챔피언십 때 (대한이가 마지막날 ‘우승하겠다’는 마음으로 최종 라운드에 나선 뒤 기어이 우승하는 걸 보면서 큰 자극을 받았다”고 했다.
시즌이 개막하면서 그는 일단 2부인 챌린지 투어에 집중했다. 난생처음 접한 투어여서 낯설었지만 그래도 배수진을 치고 임했다. 처음에는 샷감이 올라오지 않아 고전했지만 점차 성적이 좋아지면서 자신감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박성국은 “상반기에 나갈 수 있는 KPGA투어 대회가 아예 없었다”라며 “많은 선수가 불참하는 바람에 시드 순위에 의해 출전했던 KPGA 클래식을 제외한 나머지 상반기 출전 대회는 다 예선전을 거쳤다”고 눈물 젖은 빵을 먹었던 시기를 회상했다.
이제는 이른바 당당한 정규직으로 나머지 대회에 출전할 수 있게 됐다. 그는 당초 오는 25일부터 나흘간 경기도 여주 페럼클럽에서 개막하는 현대해상 최경주 인비테이셔널과 10월1일부터 나흘간 경북 예천 한맥CC에서 열리는 KPGA경북오픈에만 출전이 가능했다.
현대해상 최경주 인비테이셔널은 호스트인 최경주(55·SK텔레콤)의 추천, KPGA경북오픈은 포인트 상위권 선수들의 대거 불참으로 출전 기회를 잡게 됐다. 골프존 오픈 우승으로 올 시즌 남은 대회 자동 출전권을 획득하면서 그가 사용하려했던 추천 티켓은 다른 선수에게 기회로 돌아갔다.
박성국은 “현대해상 최경주 인비테이셔널은 투어 데뷔 11년 만에 거둔 생애 첫 우승이어서 개인적으로 각별한 대회다. 그래서 염치 불고하고 최 프로님께 추천을 부탁했는데 흔쾌히 수락해 주셨다”라며 “다시 한번 최 프로님께 감사드리며 이번 우승으로 추천이 아닌 자동 출전권으로 당당하게 경쟁에 나설 수 있게 돼 정말 기쁘다. 아울러 체면도 서게 됐다”고 말하며 웃었다.
현대해상 최경주 인비테이셔널에 출전하기 위해 귀국을 준비 중이던 최경주도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우승 직후 (박)성국이에게 축하 전화를 했다”라며 “성국이가 대회에 출전하고 싶다는 진심을 담아 내게 장문의 편지를 써서 보냈을 때 ‘정말 마음고생이 컸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흔쾌히 받아들였다.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정상을 차지한 성국이가 참으로 대견스럽고 자랑스럽다”고 후배를 향해 엄지 척을 해 보였다.
많은 선수가 그렇듯이 박성국에게도 ‘롤모델’은 최경주다. 금욕에 가까운 철저한 자기 절제로 기복 없이 꾸준하게 투어 활동을 하는 모습을 닮고 싶어서다.
박성국은 “시드를 잃고 나서 많은 부문에서 변화가 있었다”라며 “좋아하던 술을 안 마시고 러닝도 하면서 몸 관리를 했다. 유혹을 이겨내는 것이 아직은 힘들지만 좋아하는 것을 계속했더라면 어쩜 골프존 오픈 마지막날 후반 9홀에서 제대로 된 스윙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고 했다.
박성국은 드라이버 평균 비거리만 놓고 보면 투어 하위권이다. 그럼에도 경쟁력은 결코 처지지 않는다. 생존을 위한 비밀병기가 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아이언샷이다. 아이언은 티샷만 페어웨이를 지키면 다 붙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특히 100야드 안팎 웨지샷 정확도는 투어 최정상이다.
거기다 작년에 좋지 않았던 퍼트마저 본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는 “퍼트를 꽤 잘하는 편이었는데 너무 오랫동안 안돼 올해 퍼터를 교체했는데 올 초부터 퍼트 감이 좋았다”고 강한 자신감을 내보였다.
얼떨결에 한 느낌이었던 생애 첫 우승에 비해 이번 통산 두 번째 우승에서는 진짜 우승 맛을 만끽했다는 박성국은 “내년 시드를 획득하는 게 올해 목표였는데 이뤄냈다”라며 “이젠 올 시즌 남은 대회도 출전하게 돼 정말 기쁘다. 남은 대회에서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내비쳤다.
정대균 골프선임기자 golf56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