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마 파시’는 배우와 관객이 2시간을 함께 견디며 앞으로 나아가는 작품이에요. 그래서 공연이 끝났을 때 나오는 박수는 무대 위의 배우만이 아니라 관객 자신에게도 보내는 거라고 생각해요.”
연극 ‘프리마 파시’(~11월 2일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 출연 중인 배우 김신록(44)이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가진 라운드 인터뷰에서 작품이 주는 무게감을 토로했다. 1인극 ‘프리마 파시’는 승승장구하던 젊은 여성 변호사 테사가 성폭력 피해를 겪은 뒤 겪는 법정 다툼을 그렸다. 호주 출신 인권 변호사 겸 극작가 수지 밀러가 쓴 이 작품은 성폭력 피해자가 견뎌야 하는 가혹한 현실과 사법 시스템의 허점을 날카롭게 포착해 관객들에게 강렬한 울림을 준다.
“지난해 ‘프리마 파시’의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 도전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테사라는 인물이 성폭행이라는 사건을 만나기 전과 후로 세계관의 큰 변화를 겪거든요. 전반부에서 이성과 논리로 승소를 거듭하는 테사는 세상의 주체지만, 후반부에선 전반부의 세계가 철저히 무너진 뒤 성폭행 당일의 기억과 싸우며 무너지길 반복하거든요.”
김신록은 2004년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연극 ‘서바이벌 캘린더’로 대학로에 데뷔했다. 서울대에서 지리학을 전공한 그는 한양대 대학원에서 연극영화학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서 예술전문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연극 무대에 꾸준히 올랐다. 그리고 2011~201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ARKO)의 지원금을 받아서 2년 동안 해외 극단을 찾아다니며 워크숍에 참여했다. 그때 만난 뉴욕의 극단에 매료돼 2013~2014년 극단이 운영하는 실기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연기를 가르치는 한편 연극 무대에서 존재감을 발휘하던 그는 2020년부터 드라마와 영화에 본격적으로 출연했다. 그리고 2021년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과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은 그의 연기력을 대중에 각인시키는 전환점이 됐다. 영상매체에 출연하면서도 그는 연극도 연간 1편 정도는 꾸준히 출연하고 있다. 그리고 2022년과 2024년 출연한 1인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로 호평을 받기도 했다.
“1인극의 매력은 배우가 무대에서 실시간으로 겪어내는 심신의 변화가 극의 변화와 얽히고설켜 필연적으로 메타적인 힘을 갖는 점이에요. 이번 작품의 경우 배우 김신록과 극 중 인물 테사가 뒤섞이기 때문에 관객에겐 공연 중 둘을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김신록은 이번 작품에서 2시간 동안 무대 위에서 퇴장도 없이 모든 상황을 진술하고 재현하며 극한의 감정선을 오간다. 커다란 테이블과 의자를 옮겨가며 스스로 극의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대사량도 많은 데다 대본을 읽을수록 깊이 사유해야 할 부분이 나와서 그는 난생처음으로 밤을 꼬박 새운 채 첫 공연 무대에 올랐단다.
“‘성폭행 피해자이자 생존자로서 말씀드린다’는 대사를 부끄럼 없이 발언하기까지가 힘들었어요. 왜냐면 이 작품이 단순히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예전보다 힘이 빠졌어도 ‘미투’(Me too)는 여전히 계속되는 만큼 사회적인 작품으로서 진정성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편 이번 작품은 그를 포함해 소리꾼으로 잘 알려진 이자람과 뮤지컬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차지연이 번갈아 무대에 선다. 연출가 신유청이 제시한 큰 맥락의 해석은 동일하지만 세 배우에게 연기의 자율성을 많이 준 만큼 각 공연의 분위기가 다르다는 평이 많다. 그는 “차지연 배우가 사실주의적이고 감정적인 진폭을 강하게 드러낸다면, 이자람 배우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리꾼답게 관객과의 관계를 경쾌하게 이끌어나간다”면서 “나는 두 배우와 비교할 때 몸의 표현이 많은 것 같다. 특히 후반부에서 언어를 넘어서는 감각을 몸으로 그려내려고 했다. 셋 다 보시면 좋을 것 같다”고 웃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