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국내서도 이스라엘 공연 보이콧 논란… 서울세계무용축제

입력 2025-09-25 09:39 수정 2025-09-25 14:27
2025 서울세계무용축제 포스터(왼쪽)와 이스라엘 공연 참가에 취소를 결정한 노르웨이/자메이카 안무가 하랄 베하리. (c)서울세계무용축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공격이 ‘집단학살’로 국제 사회에서 비판받으면서 전 세계 문화예술계에서 이스라엘 보이콧 운동이 퍼지고 있다. 할리우드의 배우와 감독 등 4500여 명이 집단학살에 연루된 이스라엘 영화 단체와 협력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하는가 하면 전 세계 유명 가수 400여 명은 이스라엘 디지털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자신들의 음악 삭제를 요구한 것은 대표적이다.

한국에서도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가 초청한 이스라엘 영화 ‘개와 사람에 관하여’가 이스라엘의 학살 진실을 가리는 문화워싱이라며 문화예술인 800여 명이 상영 철회를 요구하는 등 논란이 있었다. 이 영화는 예정대로 상영됐지만, 이후 영화계 안팎에서 설전이 벌어진 후 더 이상 이스라엘 영화가 한국 영화제에 초청되지 않고 있다. 또 한국의 출판인과 작가 100여 명도 지난해 이스라엘 출판 기관을 통한 공모를 거부’하는 전 세계 작가들의 보이콧 선언에 동참하고 나섰다.

영화·출판계와 달리 공연계는 이스라엘 보이콧 처음

안티무민클럽AMC, 지금아카이브 등의 예술가(단체)들이 ‘집단학살에 대한 문제 제기는 아티스트의 개인 사정이 아니다! 서울세계무용축제는 이스라엘과 모든 협력을 끊어라!‘라는 제목의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사진은 연명 요청 글의 표지 캡처

이에 비해 국내 공연계에선 그동안 이스라엘 보이콧 운동이나 관련 논란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최근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9월 10~28일 아르코예술극장 등)에 초청된 이스라엘 무용단의 작품을 놓고 다른 해외 안무가가 문제를 제기하며 공연을 취소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여기에 축제 측이 홈페이지와 SNS 등에 ‘아티스트의 개인 사정’으로 공연이 취소됐다는 공지를 올리자, 지난 24일 안티무민클럽AMC, 지금아카이브 등의 예술가(단체)들이 ‘집단학살에 대한 문제 제기는 아티스트의 개인 사정이 아니다! 서울세계무용축제는 이스라엘과 모든 협력을 끊어라!‘라는 제목의 서명운동을 시작하는 한편 26일 11시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기자회견을 예고하고 나섰다.

유네스코 국제무용협회(CID-UNESCO) 한국본부가 주최하는 시댄스(SIDance)는 국내에서 열리는 최대 규모의 국제 무용축제다. 38편을 공연하는 올해 시댄스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광란의 유턴’이란 제목의 특집 프로그램이다. 극단적인 대립과 분열, 과거로의 퇴행하는 시대에 예술이 가야 할 길에 대한 질문이자 탐구의 취지를 담았다, 여기에는 노르웨이/자메이카 안무가 하랄 베하리의 ‘바티 보이’(9월 19일), 벨기에-한국 합작 SOIT/한스 판 덴 브룩 X 김영미댄스프로젝트의 ‘휴스턴, 문제가 발생했다’(9월 23일), 이란 안무가 아르민 호크미의 ‘쉬라즈’(9월 24일), 이스라엘 오를리 포르탈 무용단의 ‘알-아트랄’(폐허, 9월 26일), 스페인 안토니오 루스 컴퍼니의 ‘파르실리아’(9월 28일) 등 5편이 포함됐다.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관계자 발언에 문제 제기

지난 8월 13일 열린 서울세계무용축제 기자간담회. (c)서울세계무용축제

그런데, 하랄 베하리가 오를리 포르탈 무용단의 ‘알-아트랄’에 대해 시댄스에 문제를 제기했다. 해외 무용단이 아직 한국에 들어오지 않은 지난 8월 13일 열린 시댄스의 기자간담회 때문이었다. 오를리 포르탈 무용단의 항공비를 지원한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의 공관차석 바락 샤인이 ‘알-아트랄’을 소개하며 “10월 7일 이후 (이스라엘) 국민과 더불어 오를리 포르탈이 깊은 트라우마에 빠져 있던 시기에 탄생”한 작품이라 지칭한 것이다. 그는 또 “‘알-아트랄’은 전쟁으로 인한 양측 모두의 고통과 상실의 시련을 표현한 작품이다. 슬픔과 비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동시에 화해와 공존, 공유된 운명, 치유 그리고 함께하는 평화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이 작품은 유대인과 아랍인 모두를 아우르는 다양한 관객을 불러 모았으며 해방과 상호 이해를 위한 공동의 공간이 됐다”고 부연했다. 참고로 이스라엘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현대무용 강국이어서 시댄스와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은 오랫동안 협력관계를 가져 왔다. 그동안 시댄스의 기자간담회에 대사관 관계자가 참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공관차석의 발언 가운데 ‘10월 7일’은 가자지구 전쟁이 시작된 날이다. 당시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주도한 이스라엘 공격으로 1200명이 사망했다. 이에 이스라엘이 군사작전을 펴면서 가자지구에서 지금까지 6만500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이 사망했다. 베하리는 시댄스가 이스라엘 대사관의 지원을 받고 공관차석을 초청한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시댄스는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으로 지원받은 오를리 포트랄 무용수 9명의 항공비(약 3000만원) 반환을 결정했지만 베하리의 공연 취소를 막을 수 없었다.

국내 예술가들 “이스라엘의 아트워싱 반대”

안무가 하랄 베하리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의 지원을 받는 무용단의 참여와 함께 대사관 관계자의 기자간담회 참석을 확인한 후 ‘바티 보이’ 공연 취소를 알리고 있다(왼쪽). 오른쪽은 서울세계무용축제가 인스타그램에 ‘바티 보이’가 아티스트의 개인 사정을 이유로 취소됐다는 글을 올렸다. (c)하랄 베하리-서울세계무용축제 인스타그램 캡처

이번에 서명운동을 주도한 예술가들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식민지배와 군사점령을 가리기 위해 오랫동안 문화를 이용하는 아트워싱을 벌여 왔다”면서 “축제 측이 이스라엘 대사관의 후원을 거부한 것은 의미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스라엘을 협력자로 명기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공관차석을 기자회견에 초대해 집단학살을 윤색하도록 플랫폼을 마련한 데 대한 자성도 없다. 또한, 홈페이지와 예매 사이트에 ‘아티스트의 개인 사정’으로 공연을 취소한다고 공지해 하랄 베하리 팀의 보이콧을 축소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첫째, 시댄스는 집단학살 전범국가 이스라엘과의 모든 협력을 끊어라. 둘째, 시댄스는 하랄 베하리 팀의 공연 취소 사유를 ‘아티스트의 개인 사정’으로 축소한 것을 사과하고 정정하라. 셋째, 시댄스는 팔레스타인 예술계와 민중에 대한 연대와 지지를 표명하라”고 요구했다.

이와 관련해 이종호 시댄스 예술감독은 “축제가 기획한 ‘광란의 유턴’을 면밀히 봐줬으면 좋겠다. 이스라엘 무용단과 함께 이스라엘에 가장 적대적인 국가인 이란 안무가를 초청한 데서 알 수 있듯 주제와 관련해 균형감을 갖추려고 했다. 게다가 오를리 포르탈 무용단은 이스라엘의 국공립 단체가 아니라 순수한 민간단체”라면서 “안무가 오를리 포르탈은 지난해 초연된 ‘알-아트랄’(폐허)에 대해 10월 7일 이전부터 구상한 작품이라고 밝혔다. ‘알-아트랄’은 20세기 초 아랍문학을 대표하는 이집트 시인 이브라힘 나짐의 동명시와 이 시를 토대로 아랍권의 인기 가수 울 쿨숨이 부른 노래를 가지고 안무한 작품이다. 아랍어와 히브리어가 서로 얽히는 이 작품은 혼돈과 상실의 시대에 부활하는 인간의 의지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이스라엘 예술가(단체)여서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이종호 감독의 입장이다.

최근 유럽에선 이스라엘 지휘자 공연 취소에 반발

이스라엘 오를리 포르탈 무용단의 ‘알-아트랄’(폐허). (c)서울세계무용축제

유럽에서도 최근 이스라엘 예술가의 공연 취소로 논란이 인 적 있다. 지난 10일 벨기에 플랑드르 헨트 축제가 이스라엘 출신 지휘자 라하브 샤니가 이끄는 독일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18일 공연을 취소한 것이다. 이스라엘 필하모닉 음악감독이기도 한 샤니가 가자전쟁에 대한 반대 입장을 충분하게 표명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이에 대해 독일 정부가 “유럽의 수치이자 반유대주의‘라며 비판을 한 데 이어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등 거장 음악가들이 잇따라 비판 성명을 냈다. 여러 오케스트라와 수백 명의 음악가들도 온라인 청원 플랫폼에 공연 취소 철회를 위한 청원을 올렸다. 그리고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증오와 폭력을 퍼뜨리지 않는 한 공연을 금지하는 건 민주적 가치에 반한다”며 “예술가들을 출신이나 정치, 종교적 소속을 기준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결국, 바르트 더 베버르 벨기에 총리가 독일로 날아가 샤니에게 ‘깊은 유감’을 표명했다.

이종호 감독은 “시댄스가 하랄 베하리의 ‘바티 보이’ 취소를 개인 사정이라고 SNS 등에 올린 것은 불찰인 만큼 제대로 수정하겠다”면서도 “민간 축제인 시댄스에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끊고 팔레스타인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라는 것은 과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