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색깔 담은 발레가 홍콩발레단의 정체성”

입력 2025-09-25 04:00
셉팀 웨버 예술감독이 24일 서울 서초구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초동 캠퍼스에서 인터뷰를 앞두고 공연 포스터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c)PRM

“1960년대 홍콩은 홍콩 사람들에게 황금기로 생각되는 시기에요. 그래서 향수를 느끼죠. 홍콩 배경으로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들 때 1960년대를 택한 이유입니다.”

오는 26~27일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 올라가는 홍콩발레단의 ‘로미오+줄리엣’은 ‘홍콩위크 2025@서울’의 개막작이다. 그동안 홍콩발레단 단원이 국내 갈라공연에 참여한 적은 있지만, 홍콩발레단이 전막 레퍼토리를 가지고 내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셉팀 웨버 홍콩발레단 예술감독은 24일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초동 캠퍼스에서 열린 라운드 인터뷰에서 “홍콩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최전선”이라면서 “서구 문화에 뿌리를 둔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을 홍콩의 이야기로 변주한 이 작품은 홍콩발레단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고 밝혔다.

홍콩발레단의 ‘로미오+줄리엣’ (c)Conrad Dy-Liacco-low

1960년대 홍콩을 배경으로 한 ‘로미오+줄리엣’에서 로미오는 홍콩 유력 가문 출신이고, 줄리엣은 상하이 출신 재벌로 삼합회와 관련이 있는 집안에 속해 있다. 수많은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거리, 사람들이 모여있는 마작방, 화려한 치파오를 입은 여인들, 쿵푸를 연상시키는 거리의 격투, 분주한 영화촬영 현장 등 홍콩의 풍경이 관객을 몰입시킨다.

웨버 예술감독은 “이야기의 설정이 많이 바뀌었지만, 핵심 메시지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어떤 모든 상황에서도 사랑의 가치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과거 한국에서 홍콩 영화가 매우 사랑받았다고 들었다. ‘로미오+줄리엣’의 이미지는 왕자웨이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와 비슷하다. 홍콩영화에 대한 추억이 있는 한국 관객에게 흥미롭게 다가설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홍콩발레단의 ‘로미오+줄리엣’ (c)Conrad Dy-Liacco-low

쿠바계 미국인인 웨버 감독은 아메리칸 레퍼토리 발레단(1993~1999년)과 워싱턴 발레단(1999~2016년) 예술감독을 거쳐 2017년부터 홍콩발레단을 이끌고 있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배웠던 발레에 대한 애정으로 안무가의 길을 걸었다. 미국에서 ‘위대한 개츠비’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등 문학 원작의 내러티브 발레로 명성을 얻었다.

웨버 감독은 “나는 미국에서 조지 발란신과 머스 커닝햄으로 대표되는 선배 안무가를 보며 성장했다. 이들 선배 안무가는 스토리텔링 대신 추상적인 무용을 추구했다. 나도 안무 초기엔 이들의 영향을 받았지만 얼마 안 돼 스토리텔링을 추구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홍콩발레단에 처음 왔을 때 레퍼토리가 너무 무난해서 색깔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홍콩을 담은 레퍼토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면서 “원래 작품을 만들 때마다 열심히 조사하는 편이라서 이제는 웬만한 홍콩 사람들보다 내가 더 홍콩에 대해 많이 안다고 자부한다”고 웃었다.

홍콩발레단의 ‘로미오+줄리엣’ (c)Conrad Dy-Liacco-low

실제로 홍콩발레단은 웨버 감독이 안무한 홍콩 배경의 ‘로미오+줄리엣’과 중국풍을 가미한 ‘호두까기 인형’을 비롯해 중국 출신 상주 안무가 후 송 웨이 리키가 ‘중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불리는 축영대와 양산백의 사랑 이야기를 소재로 한 ‘나비 연인들'’(Butterfly Lovers) 같은 작품을 레퍼토리로 축적했다. 또한, 다음 시즌엔 홍콩 출신의 전설적인 무술 배우 이소룡의 삶을 소재로 한 신작도 선보일 예정이다. 웨버 감독은 “홍콩의 이야기를 담는다고 해서 홍콩에서만 통하는 작품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공감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서 “실제로 홍콩발레단의 ‘나비 연인들’과 ‘로미오+줄리엣’은 미국 뉴욕 등 해외에서 공연됐을 때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한국에서 ‘로미오+줄리엣’을 시작으로 다른 작품들도 앞으로 선보이고 싶다”고 피력했다.

1979년 창단된 홍콩발레단은 홍콩과 중국 본토 외에도 한국을 포함한 10개국에서 온 50여 명의 무용수로 이뤄져 있다. 현재 한국인 단원은 2019년 입단한 솔리스트 김은실과 지난해 군무로 입단한 최자연 등 2명이다. 홍콩 발레단은 홍콩 정부의 여가문화부로부터 연간 예산의 65% 정도를 지원받는 것 외에 발레 아카데미 운영, 티켓 판매, 기업 후원 및 각종 이벤트 참여 등으로 연간 예산을 충당한다.

셉팀 웨버 예술감독(오른쪽)과 헤이디 리 홍콩발레단 대표가 24일 서울 서초구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초동 캠퍼스에서 인터뷰를 앞두고 공연 포스터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c)PRM

이날 라운드 인터뷰에 동석한 헤이디 리 홍콩발레단 대표는 “홍콩발레단은 우수한 레퍼토리를 만드는 것 못지않게 발레단만의 매력을 활용하는 문화 기업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면서 “우리는 홍콩 디즈니랜드를 비롯해 호텔, 요트, 가구, 쇼핑몰 등 다양한 기업과 파트너십 또는 스폰서십을 맺고 있다. 연간 7개의 대형 프로덕션을 공연하지만, 기업 협찬에 따른 소규모 이벤트 공연까지 포함하면 연간 공연횟수는 200회 안팎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홍콩발레단은 이번에 ‘로미오+줄리엣’ 공연이 끝난 뒤 28일 서울에서 한국 무용수를 대상으로 한 입단 오디션을 치른다. 국제적 도시의 발레단답게 이번 시즌 서울을 시작으로 도쿄, 런던, 뉴욕, 홍콩에서 입단 오디션을 개최한다. 웨버 감독은 “매 시즌 홍콩 외에 4개 도시 정도에서 오디션을 개최한다. 홍콩의 물가가 워낙 높지만, 홍콩발레단의 연봉이 다른 발레단과 비교해 경쟁력 있는 편”이라면서 “홍콩발레단은 국제적인 발레단인 데다 다양한 기업과 협업하는 만큼 단원에겐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는 플랫폼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한다. 그래서 해외에서도 좋은 무용수들이 홍콩에 온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