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스트라를 위한 클래식 곡을 쓰는 게 처음이었기 때문에 악보와 음원을 마에스트로(얍 판 츠베덴 음악감독)에게 드릴 때 채점 받는 초등학생 느낌이었어요.”
영화 ‘기생충’과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음악감독으로 잘 알려진 작곡가 정재일이 오는 25~26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신작 ‘인페르노’(Inferno)를 서울시향 연주로 세계 초연한다. ‘인페르노’는 츠베덴 서울시향 음악감독이 지난 2023년 정재일에게 제안한 데서 시작됐다. 정재일은 23일 서울 종로구 더프리마아트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나는 음악학교에서 공부한 사람도 아닌 데다 그동안 영화나 드라마, 무용 등 프로젝트에 맞는 음악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순수하게 음악만을 위한 작업을 하는 게 부담스러웠다”고 털어놓았다.
위촉을 거절하려던 정재일은 츠베덴 감독의 격려에 마음을 바꿨다. 츠베덴 감독은 스토리가 있으면 좋겠다는 것 외엔 정재일에게 마음껏 쓰라고 했다. 이날 기자간담회에 함께한 츠베덴 감독은 “‘오징어게임’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정재일과 작업하고 싶었다. 정재일은 클래식 음악도 가능한 작곡가라고 생각했다”면서 “이번 작업은 정재일이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는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완성된 신곡 ‘인페르노’는 우리 시대에 위안을 줄 수 있는 강렬한 곡”이라고 만족감을 표했다. 이어 “오케스트라에 중요한 것은 카멜레온처럼 다양성을 가지는 것인데, 정재일의 이번 신곡 위촉 및 연주야말로 그런 특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덧붙였다.
‘인페르노’는 이탈리아어로 ‘지옥’이란 뜻이다. 정재일이 이탈리아 작가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이 작품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가는 지옥의 풍경을 음악으로 형상화했다. 영화나 드라마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정재일이지만 이번 작업은 “엄청난 경험이자 학습의 기간”이었다. 그는 “(기존 작업과) 달랐던 것은 음악에서 모든 것을 시작해 음악으로 끝내야 하는 것”이었다면서 “나는 영감이 바로 떠올라 곡을 쓰는 게 아니라 작업 시간을 버티며 이것저것 실험하며 곡을 쓴다. 그래서 곡을 쓰는 동안 지옥 같은 절망의 날들을 보내기도 했다”고 소회를 털어놨다.
15분 길이의 ‘인페르노’는 총 4개의 장(chapter)으로 구성됐다. 정재일은 당초 마지막 장에 소설 속 ‘지옥 한가운데서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 지속시키라’라는 문장을 내레이션을 넣으려다가 뺐다. 정재일은 “내레이션을 넣는 것이 관객과 연주자 그리고 마에스트로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것 같았다”면서 “마에스트로와 서울시향의 색깔이 드러나는 연주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관객도 공연장을 나설 때 각자의 느낌을 가지면 된다”고 말했다.
한편 서울시향은 오는 27일 뉴욕 카네기홀을 시작으로 미국 투어공연에서도 정재일의 ‘인페르노’를 선보일 예정이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