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도시 테베는 신화 속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도시다. 페니키아 왕자 카드모스가 제우스신에게 납치된 여동생 에우로파를 찾다가 건설한 도시가 그 시작이다. 테베는 또 제우스신과 테베 공주 세멜레의 아들인 디오니소스신이 태어난 곳이자 신앙의 중심지다. 그리고 신탁에 따라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오이디푸스 왕과 그 가족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 3인방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는 테베 왕가의 이야기들을 희곡으로 썼다.
현재 독일에서 손꼽히는 극작가 롤란트 쉼멜페니히는 테베 왕가의 비극을 소재로 한 ‘안트로폴리스’ 5부작을 2023년 함부르크 도이체스 샤우슈필하우스에서 초연했다. 그리스 신화 속 인물들을 그대로 옮겨오거나 현대적 각색을 거친 이 작품은 초연 당시 2주 간격으로 다섯 편이 순차 공개됐다. 2500년 문명사의 궤적을 강렬하고 아름답게 그려냈다는 호평을 받았으며, 관객이 10시간 이상 극장에 머물며 3일 동안 5부작을 몰아보는 마라톤 공연이 이뤄지는 등 큰 화제를 모았다. 덕분에 도이체스 샤우슈필하우스는 이듬해 독일에서 ‘올해의 극장’으로 선정됐다.
‘안트로폴리스’(Anthropolis)는 독일어로 인간의 시대를 뜻하는 안트로포챈(Anthropozän)과 도시를 의미하는 폴리스(Polis)가 결합된 말이다. 5부작은 권력, 세대 간 갈등, 도덕적 딜레마 등 문명사회에서 공동체를 이룬 인간 본성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작품은 ‘프롤로그/디오니소스’부터 ‘라이오스’ ‘오이디푸스’ ‘이오카스테’ ‘안티고네/에필로그’까지 신화 속 이야기의 시간 순서대로 진행된다. 국립극단은 올해부터 내년에 걸쳐 이 작품을 국내 초연으로 선보인다. 올해는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10월 10~26일 윤한솔 연출로 ‘프롤로그/디오니소스’를, 11월 6~22일 김수정 각색·연출로 ‘라이오스’를 무대에 올린다.
‘안트로폴리스’ 5부작 대장정의 서막을 여는 1부작 ‘프롤로그/디오니소스’는 테베 왕가의 건국과 탄생 과정을 소개하는 ‘프롤로그’, 디오니소스가 자신의 신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들을 벌하는 이야기를 담은 ‘디오니소스’로 구성됐다. 에우리피데스의 ‘바쿠스의 여신도들’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이 작품은 에우로파가 황소로 변한 제우스에게 납치되는 이야기로 시작해, 문명화를 이룬 부유한 도시 테베의 왕 펜테우스와 디오니소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특히 디오니소스가 신으로서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펜테우스를 처벌하는 과정은 집단적 욕망과 광기로 얼룩진 인간성의 비극을 드러낸다. 18명의 배우와 5명의 라이브 연주자가 무대에 오르는 대작으로 객석을 압도하는 강렬함을 보여줄 예정이다.
이어 2부작 ‘라이오스’는 쉼멜페니히가 5부작 중 유일하게 원작 각색이 아닌 직접 창작한 희곡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오이디푸스에게 죽임을 당하는 친아버지 라이오스를 서사의 중심으로 옮겨온 이 작품은 라이오스가 테베의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재구성했다. 고대 신화 이야기에 케밥 가게, 오토바이, 인스타그램 등 현대 동시대적 요소를 가미한 이 작품은 극 중 시점 또한 연대기적 구성을 탈피해 여러 관점과 시간을 교차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1부작인 ‘프롤로그/디오니소스’가 18명의 배우가 무대에 오르는 대규모 프로덕션인 데 비해 ‘라이오스’는 오직 한 명의 배우만 등장하는 1인극으로 진행된다. 배우는 라이오스, 그의 아내 이오카스테, 예언자 피티아, 테베의 시민들 등 극 중 인물이자 서술자로서 다성적인 내면과 행동을 묘사하는 이야기꾼으로 무대에 선다. 독일 공연 당시 이 작품에 출연한 리나 베크만은 ‘올해의 여배우상’을 차지했다. 95분 내내 ‘라이오스’의 국내 무대를 책임질 배우는 전혜진이 낙점됐다. 전혜진은 이 작품으로 10년 만에 연극에 복귀해 연극계 안팎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