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거지 모자를 눌러 쓴 백승덕(65)씨가 추석 연휴를 일주일여 앞둔 22일 경기 하남 벧엘나눔공동체 앞에 한쪽 다리를 절며 보조 카트에 의지해 모습을 드러냈다. 명절 선물 키트를 받으려고 내민 그의 손은 중풍의 영향으로 오므라들어 있었다. 그는 이곳에 오기 위해 새벽 6시에 일어나 4시간을 꼬박 걸어왔다고 했다. 매주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그의 하루가 그렇게 시작된 지 벌써 5년이 됐다.
백씨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안 빠져요. 여기 왔다 갔다 하는 게 벌써 8시간이잖아. 그냥 하루 종일 운동해요”라고 말했다. 그에게 이곳은 식사 공간이자 재활의 장소다. 백씨는 받은 만큼 나누는 삶을 실천한다. 그는 “항상 폐지와 병 팔아 모은 돈을 내고 먹어요. 그냥 먹은 적은 없어요”라며 “신앙을 배운 덕분에 주는 마음이 더 좋죠. 받는 것보다”라고 말했다. 설립자인 벧엘나눔공동체 이사장 강정자 목사(벧엘교회)는 “사람들하고 만나서 대화하면서 어르신들이 행복해지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복지 사각지대의 마지막 보루
벧엘나눔공동체는 하남에서 정부 지원 없는 유일한 민간 무료급식 봉사 단체다. 정부 지원은 법적 테두리 안의 수급자에게 한정되다 보니, 그 경계에 있는 ‘틈새 계층’은 복지 사각지대에 놓이기 쉽다. 이동주 사무국장은 3년 전 급식소를 이전하고 3개월 만에 이전 장소 인근의 한 어르신이 고독사했다고 전했다. 그는 “급식소가 있을 땐 다 함께 줄도 서고 질서도 지키면서 할 일이 있었는데, 이전 후에는 찾아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으니 허망하게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과거 태풍이 왔을 때 한 노숙인에게 식사를 제공했고, 다음날 그가 세상을 떠난 일도 있었다. 이 사무국장은 “그분들이 다음 날 식사하러 오실지 못하실지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할 뿐”이라며 “단순히 밥을 주는 것을 넘어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했다.
“문 닫지 않게 해주세요”…21년의 기도
2004년 한 식당에서 교회를 개척하며 시작된 벧엘나눔공동체는 21년간 네 이사하며 명맥을 이어왔다. 강 목사는 “내가 선택한 일에 대한 후회는 안 하는데 힘은 좀 들어요”라고 했다. 후원 회원들을 통해 들어오는 월 120만원의 빠듯한 정기후원금으로 버티지만, 치솟는 물가에 “김치 담글 때면 시장 가기가 겁난다”고 눈물을 머금었다. 하지만 그는 ‘없다’고 말하는 대신 ‘있는 만큼 나눈다’는 믿음으로 사역을 이어왔다.
강 목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안에서 일할 뿐, 찾아오는 분들을 돌려보내지는 말자’는 것이 제 원칙”이라며 “‘조그맣게라도 내가 도울 수 있는 만큼만 돕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버텨왔다”고 말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절에도 문을 닫지 않고 매일 도시락을 싸서 나눠주는 등 헌신을 이어온 것도 그 마음 때문이었다. 그의 기도 제목은 여전히 “이곳이 문 닫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에서 나눈 추석의 온기
이날 벧엘나눔공동체 앞마당은 이른 시간부터 나눔 키트를 받기 위해 조심스럽게 줄을 선 어르신들과, 송편과 햇반 등이 담긴 상자를 분주히 포장하는 봉사자들로 북적였다. 이날 벧엘나눔공동체를 통해 총 200개의 나눔 상자가 어르신들에게 전달됐다.
한세종 구세군 서기장관은 “구세군 한국군국의 ‘2025년 추석맞이 아름다운 나눔’ 행사는 성경의 정신인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돕는 일의 연장선”이라며 “전국적으로 4000개의 키트를 나누고 있는데, 특히 벧엘나눔공동체처럼 복지 사각지대에서 회원들의 회비로 어렵게 운영되는 곳에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지원 이유를 밝혔다.
이날 구세군과 벧엘나눔공동체 관계자들은 거동이 불편한 박영희(가명) 할머니의 집을 찾았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것도 잠시, 박 할머니는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암이 전이된 며느리와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손자 걱정에 마음이 무겁다”는 그는, 자녀들과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시름을 견딘다고 했다. 박영희 할머니는 “너무 감사하지요”라며 “이건 뭐 누가 생각해줘요, 교회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생각해줘서 그렇지”라고 말했다.
하남=글·사진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