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EC 공식 만찬장 라한호텔로 변경…“경주 품격 낮췄다”

입력 2025-09-22 09:34
경북 경주시 경주국립박물관에서 APEC 정상회의 만찬장 조성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2025 APEC 정상회의’가 불과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공식 만찬장이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경주 라한호텔 대연회장으로 전격 변경되면서 파문이 일고 있다.

무엇보다도 미·중 정상의 드라마틱한 경주 만남이 유력해진 상황에서 천년고도의 멋과 역사성·상징성을 전 세계에 각인시킬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찼다는 점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게 지역사회 여론이다.

만찬 장소를 전 정부에서 결정했다고는 하지만, ‘K-컬처’를 국정과제로 삼은 이재명 정부의 진정성에도 의문을 가지게 한다는 지적이다.

APEC 정상회의 준비위원회는 지난 19일 제9차 회의를 열고 공식 만찬장을 국립경주박물관 중정 내 신축 건축물 대신 라한호텔에서 진행하기로 의결했다.

당초 준비위는 지난 1월 국립경주박물관을 만찬장으로 확정하고 국비 80억원을 투입해 연면적 2000㎡ 규모의 신축 건물을 건립해 왔지만, 공사 지연과 시설 부족 문제가 잇따라 제기됐다.

지난 6월 국회 APEC특위 현장 점검에서는 낮은 공정률이 지적됐고 이달 4일 특위 전체회의에서도 화장실·조리실 등 기본 시설이 미비하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플랜B’ 필요성이 논의됐다.

결국 지난 17일 공정률 95%가 보고됐음에도 불구하고 이틀 만에 만찬장은 라한호텔로 변경됐다.

준비위는 “국내외 각계를 아우르는 폭넓은 인사가 참여할 예정이어서 보다 많은 인사를 초청할 수 있도록 호텔 대연회장에서 만찬을 진행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최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주석의 참석 가능성이 커져 글로벌 CEO를 비롯한 APEC 참가자가 크게 늘 것으로 예상되자 지난주부터 장소 변경이 집중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립경주박물관 만찬장은 최대 수용 인원이 250명 정도인 데 비해 라한 호텔 연회장은 400명 넘게 수용이 가능하다.

한옥 만찬장 안에 조리 시설과 화장실이 없는 점도 문제로 제기됐다. 각국 정상들에게 대접할 음식을 외부에서 배달해 와야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경북도는 만찬장에서 약 30m 떨어진 커피숍에 조리 시설을 꾸몄다. 화장실은 약 40m 떨어진 박물관 화장실을 사용해야 한다. 앞서 지난 17일 정부 합동 안전 점검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지적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문화적 상징성’을 앞세운 박물관 만찬 계획이 좌초됨에 따라 지역사회에서는 “경주의 품격을 낮췄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경주시와 시민들은 “정상들이 성덕대왕신종이나 신라금관 등을 배경으로 촬영한 단체 사진이 전 세계 언론에 노출되는 등 경주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만찬장 장소가 변경돼 아쉽다”며 “자칫 ‘경주다움’이 희석될 수 있다”고 우려를 제기했다.

이들은 “중앙정부에서 APEC 개최도시 경주가 전 세계의 이목과 관심을 받을 수 있도록 만찬장이나 관련 프로그램에 ‘경주다움’을 녹여 내 줘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만찬장 변경에 따라 국립경주박물관 신축 건물은 APEC CEO 써밋과 연계한 기업인·정상 간 네트워킹 허브로 활용된다.

오는 10월 27일부터 11월 1일까지 열리는 APEC 주간에는 국내 전략산업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참여하는 퓨처테크 포럼 등 다수의 경제행사가 이곳에서 열릴 예정이다.

준비위 측은 이번 APEC 정상회의를 한국 경제의 재도약과 지역경제 활성화, 관광산업 진흥의 계기로 삼겠다며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국비가 투입된 신축 건물이 정상 만찬장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임시 행사장으로 쓰인 뒤 철거될 가능성까지 제기돼 예산낭비 논란이 불가피해졌다.

경북도 관계자는 “박물관 신축 건물이 단순한 임시 건물이 아니라 정상회의 기간 주요 글로벌 경제행사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공식 행사가 열리는 장소로 남을 수 있도록 활용해 줄 것을 정부에 건의하겠다”고 밝혔다.

경주=김재산 기자 jskimkb@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