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해외 ‘전문직 비자’인 H-1B 비자 수수료에 대해 10만 달러(약 1억4000만원)의 수수료 부과를 발표하면서 미국 내 빅테크 기업들이 충격과 공포에 빠진 모습이다. 적용 대상과 범위를 두고서도 혼선이 계속되고 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 등 기술전문 인력은 물론,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도 H-1B 비자로 미국에 들어온 점을 들어 이번 조치가 미국의 인재 유입을 더욱 제한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백악관은 20일(현지시간) 설명자료를 내고 “미국 근로자의 일자리를 대체하고 국가 안보를 약화하는 남용을 막기 위해 새로운 H-1B 비자 신청 시 10만 달러의 추가 납부금을 요구한다”며 “미국 노동자들은 저임금 외국인 노동자들로 대체되고 있으며, 이는 국가 경제 및 안보에 위협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전날 H-1B 비자 수수료를 현 1000달러의 100배인 10만 달러로 올리는 내용의 포고문에 서명했다. 새 수수료 규정은 9월 21일 0시 1분부터 발효된다.
백악관은 이번 조치가 신규 신청자에게만 적용된다고도 설명했다. 캐럴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10만 달러 납부는 신규 비자에만 적용되며 갱신이나 현재 비자 소지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며 “H-1B 비자 소지자들은 평소와 같은 범위 내에서 출국과 재입국이 가능하며 그런 권한은 어제 발표된 포고문으로 인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레빗 대변인은 해당 수수료가 연간 납부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일회성 수수료”라고도 덧붙였다. 이는 전날 하워드 러트릭 상무장관이 포고문 서명식에서 10만 달러의 수수료가 ‘연간 수수료’라고 말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백악관이 부랴부랴 이같은 입장을 밝힌 것은 포고문 발표 직후부터 기업과 비자 소지자들이 충격과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 외부로 출장 중이거나 여행 중인 H-1B 소지자들은 재입국이 어려워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확산했다. 새 규정이 발표되자 마이크로소프트(MS)는 해외 체류 중인 H-1B 비자 소지 직원들에게 “재입국 거부를 피하기 위해” 미국에 머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미국으로 귀국하라고 권고했다. 구글과 아마존, JP모건도 출장 중인 H-1B 직원들에게 새 규정이 발효되기 전에 귀국하라고 촉구했다.
백악관의 설명에도 이번 조치로 숙련된 해외 인재가 미국으로 들어오는 문이 더 좁아질 것이라는 예측이 대체적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날 “H-1B 비자의 최대 수혜자인 기술 기업들은 특히 큰 타격을 입을 전망”이라며 “새 규정이 유지될 경우 합법적 이민의 주요 경로도 제한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현재 약 50만명이 H-1B 비자로 미국에 체류 중이다. 머스크 등 IT 계열 인사들 상당수가 해당 비자를 통해 미국에 들어왔다. 머스크는 지난해 12월 “스페이스X, 테슬라 및 미국을 강하게 만든 수백 개의 다른 기업들을 만든 핵심 인재들과 내가 미국에 있는 이유는 H-1B 비자 덕분”이라고 적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부인 멜라니아 여사도 H-1B 비자로 미국에 왔다고 WP는 전했다.
민주당 소송 마크 워너 상원의원은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대통령의 많은 정책이 반이민적인 성격을 띠면서 과거와 같은 수준의 인재들이 대학원이나 대학교에 오거나, 미국에 일하려고 오는 경우가 줄어들고 있다”며 “이는 장기적으로 우리 경제에 해를 끼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의 수수료 폭등 조치가 비자의 기간을 설정하는 의회 권한을 침범했기 때문에 법적 논란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번 조치는 해외에서도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데 특히 인도는 즉각적으로 우려를 표명했다. 지난해 기준 H-1B 비자 소지자의 70% 이상이 인도 출신이기 때문이다. 인도 외교부는 성명을 내고 “숙련된 인재의 이동과 교류가 미국과 인도의 부 창출에 크게 기여해왔다”며 “상호 이익을 고려해 최근 조치를 평가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H-1B 비자는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분야의 전문 직종에 적용되는 비자다. 추첨을 통해 선발하는데 연간 발급 건수가 8만5000건으로 제한돼 있다. 기본 3년 체류가 허용되며 연장도 가능하다. 미국이 해외 기술 인재들을 유입하는 주된 통로였지만, 트럼프 강성 지지층인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은 H-1B 비자로 들어온 외국인들이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임성수 기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