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만물센타 하르방은 왜 화내면서 애순이를 도왔을까

입력 2025-09-19 17:53 수정 2025-09-19 22:32
제주시 구좌읍 김녕해수욕장 인근에 위치한 용천수 청굴물. 한여름에도 수온이 12~14도로 차갑고,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찾는 이들이 많다. 제주관광공사 제공

늦더위가 이어지던 지난 30일, 제주에 오면 시원한 용천수에서 꼭 물놀이를 해보고 싶다는 지인과 청굴물을 찾았다. 청굴물은 김녕해수욕장 인근 청수동이라는 자연마을에 있는데, 물이 맑고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사진 명소로 인기가 많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지나 마을 주차장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분주히 들고 나는 모습이 보였다. 차를 세우고 시동을 끄는데, 한 동네 어르신이 다급하게 외쳤다. “거기 세우지 맙서! 길 막히는 곳이우다.”

놀란 우리는 창문을 내려 눈인사를 건네고는 어디에 세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곤 서둘러 차를 빼기 위해 다시 시동을 켜는데, 어르신이 “잠깐 기다려보라”더니 잠시 후 주변 자리를 가리켰다. 마침 물놀이를 마친 가족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얼마 후 차가 출발했고, 우리는 어르신의 안내 덕분에 무사히 주차를 마칠 수 있었다. 어르신의 얼굴에 설핏 안도감이 스치는 듯 했다. “이게 화낼 일이냐”며 투덜대는 동생에게 “화낸 게 아닐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도동리 만물센타 할아버지
지난 3월 방영한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 이런 비슷한 할아버지가 나왔었다. 주인공 애순의 이웃, 도동리 만물센타 하르방(‘할아버지’를 뜻하는 제주어)이다.

애순이네가 세 든 집 주인이기도 하다. 만물센타 하르방은 먹을 게 없어 도움을 청하러 온 애순이에게 대뜸 소리를 지르지만, 이후 사계절 내내 먹을 것을 챙겨준다. 초란과 삶은 돼지고기를 가져다 주고, 음식을 주러 갔다 불이 꺼진 애순이네를 보고는 혼자 화를 내기도 한다.

지난 3월 첫 방송한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포스터. 넷플릭스 제공

만물센타 할망(‘할머니’를 뜻하는 제주어)도 하르방 못지않다. 할망은 애순이네 부엌에 몰래 들어가 딱 세 식구 꼭 하루치 먹을 만큼의 쌀만 쌀독에 넣어둔다. 미안해하지 말라는 거다. 문어며, 애순이의 딸 금명이 사탕이며, 여러 가지를 챙겨주지만 만물센타 할망 하르방이 살가운 말투를 건넨 적은 한 번도 없다.

#짧고 간결한 제주어
도동리 만물센타 하르방은 드라마에서 제주 이웃의 전형으로 등장한다. 무뚝뚝한 말투 속에 담긴 따뜻한 인심은 제주 사람들이 척박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낼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만물센터 하르방의 말투는 그 마음과 다르게, 투박하기 그지없다.

제주어는 문장이 간결하다. 감정 표현이 크지 않고, 억양이 낮고 단조롭다. 여기에 큰 목소리와 외지인을 경계하는 태까지 더해지면 무뚝뚝하고, 불친절하다는 인상을 주기 십상이다. 표준어와 다른 고유 어휘가 많아 제주어를 잘 모르면 의사 소통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육지 사람들은 제주 사람들의 말투를 어떻게 봤을까. 낯설고 딱딱하다는 인상은 옛날에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중기에 편찬된 지리지 '동국여지승람'에 제주어에 대한 기록이 있다. 사진 왼쪽은 동국여지승람 표지. 오른쪽은 오는 23일 개막하는 제주돌문화공원 '사투리는 못 참지!' 특별전에 전시된 관련 패널의 일부.

1481년에 편찬된 지리서 ‘동국여지승람’ 제주목 편에는 ‘마을 백성들의 방언은 거칠고 이해하기 어렵다. 말의 억양은 앞부분은 높고, 뒷부분이 낮다’(俚語艱澁 村民俚語艱澁先高後低)고 기록되어 있다.

성리학자 김정은 1521년 제주 유배 중 남긴 ‘제주풍토록’에서 ‘토착민의 말소리는 가늘고 높아 마치 바늘로 찌르는 듯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많다’(土人語音 細高如針刺 且多不可曉)고 적었다.

제주어는 문장 끝으로 갈수록 음조가 낮아지는 하강 억양이 일반적이다. 성조나 음장이 의미를 결정하는 경상도 방언이나, 문장 뒤로 갈수록 억양이 높아지는 서울말과 차이를 보인다. 제주에는 특이한 어휘도 많은데, ‘탐라지’(1653)에는 “제주에서는 ‘서울’을 ‘서나’, ‘숲’을 ‘고지’, ‘산’을 ‘오름’, ‘손톱’을 ‘손콥’ 등으로 표현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바람이 흩뜨려 놓은 말
제주어는 투박하지만 실용적인 말투다. 섬에서는 바람이 말소리를 흩뜨려 놓기 때문에 필요한 말을 짧고 크게 전달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척박한 땅에서 농사를 짓고, 물질을 하며 쉴 틈 없이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부드럽고 풍부한 감정보다 절제되고 간결한 어투가 배어들 수밖에 없었다.

19일 오후 제주 서귀포시 성산일출봉에 외국인 관광객들이 찾아와 기암절경을 감상하고 있다. 지난해 13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제주를 찾았다. 뉴시스

역사적 여건은 외지인을 경계하는 제주만의 특성을 형성했다. 조선 인조대인 1629년부터 200년간 제주에는 출륙금지령이 내려져 외부와의 교류가 단절됐다. 섬 내부의 공동체 결속력은 더욱 강해졌고, 외부인은 자연스럽게 ‘낯선 존재’로 인식됐다.

1850년 이후 출륙금지령이 해제되고, 일제강점기와 4·3, 한국전쟁 시기에 외지인 유입이 크게 늘었다. 이 무렵 제주에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 군사적·정치적 목적에 따른 일시적 파견이었고, 도민사회에 갈등과 상처를 남긴 경우가 많았다.

#새롭게 조명되는 제주어
제주어에 대한 인식은 달라지고 있다. 다름과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로 변화하면서 제주어를 비롯한 지역 방언들이 소중한 언어 자원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과거에는 제주어 사용을 금지하던 학교들이 이제는 제주어 교육을 장려하고 있다. 제주에서는 제주어를 포함한 제주문화학교가 ‘제주형 자율학교’의 한 유형으로 운영되고 있다. 제주어 시범 연구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수업 시간에 제주어를 배운다.

드라마 시장에서도 제주어의 비중은 점차 커지고 있다. 예전에는 제주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출연진은 표준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에는 주인공들이 제주어를 직접 사용하는 드라마가 늘어나며 흥행 성과도 함께 나타나고 있다.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은희(이정은), 동석(이병헌), 인권(박지환), 호식(최영준) 등은 제주어를 사용해 제주라는 공간과 제주 사람들의 삶을 더욱 생생하고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제주돌문화공원 특별전 '사투리는 못 참지!'의 포스터. 포스터 속 패턴은 우리나라 여러 지방 사투리의 억양을 이미지화한 것이다. 제주도 제공

‘폭싹 속았수다’ 방영 이후 제주어에 대한 관심은 더 높아졌다. 방영을 시작한 지난 3월과 4월 사이 유튜브에는 제주 방언을 주제로 한 콘텐츠가 각각 26편과 32편 업로드됐다. 4월 한 달 동안 누적 조회수가 220만회를 기록하는 등 제주어에 대한 호기심이 온라인 콘텐츠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였다.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뜻의 드라마 제목 ‘폭싹 속았수다’는 뉴스 콘텐츠와 광고 문구 등 다양한 매체에서 인용되며 전국적인 인기를 입증했다.

#보전이 필요한 제주어
제주어를 보전하기 위한 노력도 중요해졌다. 제주도는 4년마다 제주어발전기본계획을 수립해 계층별 교육, 구술 채록, 연구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다.

‘제주어 교육 활성화 조례’를 제정해 교육 현장에서 제주어 전승 노력을 지원할 근거를 마련했으며, 제주어를 체계적으로 보전하기 위해 제주어 박물관 설립도 추진하고 있다.

제주학연구센터에서는 ‘제주어웹사전’을 개발해 올해 연말부터 시범 운영한다. 웹사전의 이름은 전국 공모를 통해 ‘제주어 밭’이라는 뜻의 ‘제주어왓’으로 결정했다. ‘무엇’을 뜻하는 영어 ‘What’을 연상시켜 제주어가 무엇인지 궁금할 때 찾는 곳이라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하지만 여전히 제주어는 어렵다. 2014년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하는 것을 원칙으로 제주어 표기법이 제정됐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표기 방식에 대한 명확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그렇다보니 민간은 물론 공공기관에서 작성한 문구에서도 가끔 틀린 표현을 볼 수 있다. 엄밀히는 드라마 제목도 ‘폭싹 속았수다’가 아니라 ‘폭삭 속앗수다’여야 맞다. ‘매우’라는 뜻의 ‘폭싹’은 ‘폭삭’이 바른 표현이고, 제주어는 과거형에 쌍시옷(ㅆ) 대신 시옷(ㅅ)을 쓰기 때문이다.

19일 제주돌문화공원 설문대할망전시관에서 오는 23일 개막을 앞둔 '사투리는 못 참지!' 특별전 준비가 한창이다. 이번 전시는 국립한글박물관과 공동 주최한다. 문정임 기자

#흥미로운 전국 사투리 전시
제주돌문화공원관리소는 오는 23일 설문대할망전시관 기획전시실에서 ‘사투리는 못 참지!’ 특별전을 연다.

국립한글박물관과 함께 주최하는 이번 전시는 1·2부는 방언의 개념과 표준어의 등장, 방언으로 쓰인 문학 작품 등을 선보이고, 3부에서 제주어를 조명한다.

한라산을 기준으로 남쪽(서귀포시)과 북쪽(제주시), 서쪽과 동쪽의 다른 언어를 현지 주민의 발음으로 소개한다. 광복 이후 본격화된 제주 방언 보전을 위한 도내 단체들의 활동도 볼 수 있다. 관람객이 제주어와 8도 방언을 맞추는 ‘제주어·사투리 능력고사’ 등의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된다.

이번 전시를 준비한 제주돌문화공원 관계자는 19일 “제주어에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일부 언어와 제주의 환경에서 생겨난 독특한 어휘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며 “표준어가 눈으로 읽고 손으로 쓰면서 배우는 말이라면, 방언은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며 배우는 자연스러운 말로, 제주어는 제주의 문화와 풍습을 담고 있는 소중한 언어”라고 설명했다.

2010년 유네스코는 제주어 사용 인구를 5000명에서 1만명 사이로 추정해 ‘아주 심각하게 위기에 처한 언어’로 분류했다.

이는 유네스코가 제시한 5단계 소멸위기 언어 분류 중 네 번째 단계로, 세대 간 언어 전승이 거의 단절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 기사는 제주특별자치도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