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도 의사를 고소할 수밖에 없는 현실”

입력 2025-09-17 17:11
국민일보 DB

최근 한 대학병원의 산과 의료진이 신생아 뇌성마비 분만 사고로 6억5000만원 배상 판결을 받고, 형사 재판에 넘겨진 소식이 뒤늦게 전해졌다. 의료계는 이번 형사 기소를 분만 행위에 내포된 ‘불가항력’을 고려하지 못한 조치라고 반발하고 있다. 환자단체도 의료사고시 생기는 울분을 해소할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는 한 의료사고 소송이 빈번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17일 서울 영등포구 사무실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의료사고 당사자가 겪은 어려움과 울분은 참담한 수준이다. 의사도 의사를 형사 고소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의료진도 의료사고를 겪은 당사자가 되면 의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대학병원 산과 교수 30명은 지난 15일 낸 성명서에서 “의학적 최선의 판단을 사후적 관점에서 일률적으로 재단해선 안된다”며 “불가항력적 사고까지 형사 책임을 묻는 것은 명백히 부당하다” 밝혔다.

최근 논란이 된 분만사고는 2018년 12월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출산 직후 아기가 저산소증으로 인한 뇌성마비를 진단받은 사건이다. 당시 같은 병원의 마취통증의학과 전임의였던 산모 측은 2021년 병원과 교수, 전공의를 상대로 약 24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뱃속 아기 상태를 나타내는 ‘태아심장박동수’를 면밀히 살피지 않고, 자궁내소생술 등의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민사소송 1심 결과는 산모 측 승소였다. 재판부는 의료진의 관찰이 소홀했고, 대처가 미흡했다고 판단해 약 6억5000만원 공동 배상 판결을 내렸다. 다만 과실 정도가 크지 않다고 보고 책임범위를 손해배상액의 30%로 제한했다. 민사 소송은 현재 항소심을 진행 중이다.

논란은 의료진이 지난 8월 업무상 과실치상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면서 확대됐다. 특히 의료계는 형사 기소에 반발한다. 분만사고에 내재되어 있는 불가항력을 고려하지 않은 형사 기소가 의료진의 필수의료 기피를 부추긴다는 것이다. 대한의학회는 지난 11일 성명서에서 “뇌성마비와 같이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나쁜 결과에 대해 의료진의 단순 잘못으로 단정하고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게 하는 것은 의사들에게 산모를 보지 말고 분만장을 떠나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환자단체는 민·형사 소송은 병원 측의 초기 대응이 미흡했던 결과라고 지적한다. 의료사고가 발생하면 병원 측의 충분한 설명과 애도의 표시, 신속한 피해배상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울분을 느낀 환자들이 소송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의료사고 피해자가 겪는 울분은 의사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다”고 말했다.

환자단체와 의료계 모두 분만사고의 보상제도가 확대되어야 한다는 데는 같은 입장이다. 현재 보상한도가 최대 3억원인 ‘불가항력 의료사고 보상제도’의 보상액을 더 키워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번 분당서울대병원 분만사고는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조정이 이뤄지지 않았고, 이미 1심 판결이 나온 터라 심의 대상은 아니다. 분당서울대병원 관계자는 “이제 막 보완되고 시작된 제도라서 금액적인 면에서 많은 기대를 하긴 어렵다”고 토로했다.

이정헌 기자 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