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비 2억 ‘얼굴’…연상호의 구상, 실현한 박정민

입력 2025-09-16 16:37
영화 ‘얼굴’의 연상호 감독(왼쪽 사진)과 주연 배우 박정민.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전에 없던 방식으로 제작된 영화 ‘얼굴’이 스크린에 걸렸다. 순제작비 2억원이 든 초저예산 영화다. 지난해 독립·예술영화 평균 순제작비(3억원)에도 못 미치는 액수다. 촬영 회차는 보통 장편영화의 5분의 1 수준인 13회에 불과하다. 더 놀라운 건 결과물의 완성도가 여느 상업영화 못지않다는 점이다.

수백 억원대 작품이 즐비한 영화계에서 보란 듯 통념을 깨부순 시도였다. 이 용감한 행보의 주인공은 ‘부산행’(2016) ‘염력’(2018) ‘반도’(2020) ‘계시록’(2025) 등 대형 상업영화를 만들고 성공시킨 연상호(47) 감독이다.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15일 만난 그는 “전작들이 개봉 초부터 관객이 몰렸던 반면 이번엔 입소문이 서서히 퍼져 나가는 느낌이라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얼굴’은 앞을 보지 못하는 전각 장인 임영규(권해효)의 아들 임동환(박정민)이 40년 만에 백골로 돌아온 어머니 정영희(신현빈)의 죽음에 관한 비밀을 파헤치는 이야기다. 연 감독이 2018년 직접 쓰고 그린 동명 그래픽노블이 원작이다. 지난 11일 개봉한 영화는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을 제치고 박스오피스 1위로 올라서며 흥행 중이다. 손익분기점은 이미 훌쩍 넘어섰다.

영화 ‘얼굴’의 한 장면.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는 ‘아름다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아름다운 건 추앙받고 추한 건 멸시당한다”는 신념을 가진 영규가, 어딜 가나 “괴물같이 못생겼다”고 조롱받는 영희와 결혼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영정조차 없는 영희의 얼굴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공개된다. 연 감독은 “누구의 얼굴도 아니면서 어딘가 존재할 거 같은 얼굴이었으면 했다. 그것이 이 영화와 현실의 다리이자 논쟁의 시작이 되길 바랐다”고 설명했다.

저예산 제작 방식을 택한 건 ‘재미있는 영화를 만든다는 건 무엇인가’라는 고민에서 출발했다. 초등학교 4학년 큰딸이 보는 유튜브를 옆에서 같이 보다가 문득 콘텐츠 창작가로서 위기감을 느꼈다. 적은 예산으로 만든 재미있는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과연 경쟁이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연 감독은 “결과가 어찌 되든 창피당할 걸 각오하고 한번 시도해 보자 싶었다”고 털어놨다.

영화 ‘얼굴’에서 박정민이 연기한 과거 임영규(왼쪽 사진)와 권해효가 연기한 현재의 모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제작에 탄력을 받은 건 배우 박정민(38)의 합류 덕이었다. 그후 다른 배우와 스태프들의 참여가 이어졌다. 영화 ‘염력’, 시리즈 ‘지옥’에서 연 감독과 작업했던 박정민은 노개런티로 출연했다. 원작 만화의 팬인 그는 “2018년쯤 감독님이 이 작품을 언젠가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얘기하셨을 때 ‘날 시켜 달라’고 했다. 출연 제안을 받고 기분 좋았다”면서 “소정의 출연료를 주신다고 했지만 회식비로 쾌척했다”며 웃었다.

박정민은 젊은 시절 영규와 아들 동환을 1인 2역으로 설정하자는 아이디어를 직접 제안했다. 연기 인생 처음으로 1인 2역에 도전한 그는 “아버지와 아들을 같은 인물이 연기해 휘몰아치는 감정의 여운이 더 깊어진 거 같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연 감독은 “1인 2역은 대단한 아이디어였다. 박정민은 작품이 나아갈 방향을 감독 이상으로 잘 읽는 배우”라며 “게다가 최고의 연기를 보여줬다. 동환은 현대적 연기로, 영규는 시대의 풍미를 담은 연기로 훌륭히 대비시켰다”고 치켜세웠다.

영화 ‘얼굴’ 주연 배우 박정민.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박정민은 지난해 말부터 ‘배우 안식년’에 들어갔다. 빡빡한 촬영 스케줄에 치여 “대충 열심히” “동어반복”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잠시 쉬어야겠다 결심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출판사 ‘무제’의 대표이기도 한 박정민은 요즘 출퇴근하며 출판사 일에 매진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인지도가 출판사 운영에 도움이 된다고 인정하면서도 “책을 만들고 소개하는 과정에서 기존 출판사들이 해오던 걸 뒤집는 방식을 취하진 않는다”고 강조했다.

박정민은 “착한 책을 만드는 회사가 되고자 한다. 이야기할 만한 주제와 들여다볼 가치가 있는 책들을 세상에 내놓고 싶다”며 “인지도 있는 대표인 만큼 작은 목소리의 스피커가 돼드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연기 활동은 오는 12월 개막하는 공연 ‘라이프 오브 파이’로 재개한다.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이후 8년 만의 무대다. 그는 “무대가 아직 무섭지만, 워낙 근사한 작품이라 도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영화 ‘얼굴’ 연상호 감독.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연 감독은 ‘얼굴’을 계기로 소수정예 스태프와 함께하는 기동성 있는 촬영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는 “이번 작업을 하면서 ‘여기 중독돼 상업영화로 못 돌아갈 거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재미있었다”며 “에드워드 양, 구로사와 기요시 같은 아시아의 전설적 감독들도 저예산 명작을 만들지 않았느냐”고 미소를 지었다.

연 감독은 “관객의 ‘불호’를 줄이기 위해 영화의 모난 구석을 깎아내는” 기존 상업영화 제작 방식에 대한 아쉬움을 전했다. 그는 “앞으로 팬덤이 강해지는 뾰족한 영화가 트렌드가 될 거라 본다”면서 “앞으로 저예산 제작 시스템을 구축해 가면 좋겠다. 한국영화가 다른 형태로 진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얼굴’이 투자·배급사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도였다고 생각한다”고 자부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