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가 점점 더 사랑스러워져 잘 해보려는 의욕이 생긴다.”
‘플라잉 덤보’ 전인지(31·KB금융그룹)의 고백이다. 인간은 사랑을 고백할 때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고 하는 데 딱 그때 그 모습이다. 그는 지난 7일 막을 내린 KLPGA투어 시즌 세 번째 메이저대회 KB금융 스타챔피언십에 출전했다.
약 2년 만에 KLPGA투어 나들이 성적표는 공동 13위였다. 그럼에도 그는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최근 몇 년간 본 그의 표정 중에서 가장 밝아 보였다. 그만큼 행복했던 것 같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했던가. 오랜만에 만나 대화를 나눠 본 결과 그의 골프에는 더 이상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없고 화려한 날들만 가득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뱉은 말들이 희망의 언어 일색이었기 때문이다.
전인지는 2013년에 KLPGA투어에 데뷔 10승, 2016년에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로 진출해 4승을 거두고 있다. 여기에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투어 2승까지 프로 통산 16승을 올리고 있다. 그중 절반인 8개 대회가 메이저 대회 우승이어서 ‘메이저 퀸’이라는 닉네임도 얻고 있다.
한국여자프로골프를 대표한다는 데에 이론이 없을 정도로 한때 잘나갔던 스타 플레이어였다. 회원 수 9800명의 팬 카페 ‘플라잉 덤보’가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게 그 방증이다.
그랬던 전인지가 부상 여파로 작년 한 해 힘든 시기를 보냈다. LPGA투어 전체 일정의 절반에도 못 미친 11개 대회만 뛰고 투어 활동을 접은 것. 그러면서 그의 은퇴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풍문이었다. 전인지는 올 시즌에 건강한 모습으로 투어에 복귀해 15개 대회에 출전, 10개 대회에서 컷 통과했다. ‘톱10’ 입상은 아직 한 차례도 없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상당히 고무적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움츠려 있던 ‘플라잉 덤보’를 다시 날게 한 원동력은 뭘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가족에 버금가는 ‘동지애’로 환상의 콤비네이션을 보여주고 있는 ‘원팀’이다.
올해부터 스윙을 책임지고 있는 LPGA투어 프로 출신 스윙코치 김송희, 18살 때까지 멘탈을 책임졌다가 헤어진 뒤 다시 도움을 받게 된 멘탈 트레이너 조수경 박사가 ‘수호천사’로 전인지의 재기를 돕고 있는 스태프다.
전인지는 “‘한 팀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송희 언니와 조 박사님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며 “언니한테 스윙을 배우고 난 이후로는 몸에 통증이 하나도 없어 즐겁게 골프를 하고 있다”고 엄지 척을 해 보였다.
그는 이어 “조 박사님과 그동안 간간이 연락은 하고 있었다. 이번에 한국에 들어와서 직접 뵙고 얘기를 나누니 마음이 아주 편해졌고 목표 설정이 더 뚜렷해졌다”며 “골프를 향한 나의 의욕이 생각보다 크다는 걸 알게 됐다. 당연히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고 했다.
그가 올해 가장 잘한 일로 두 사람과의 재회를 꼽은 이유다. 그들과 합치기 전까지 그는 스스로 지쳐가고 있었다. 의욕과 달리 결과는 반대로 가면서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다. 하지만 이번 KB금융 스타챔피언십 때 조 박사와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그런 걱정들이 말끔히 해소됐다.
그는 “조 박사님의 ‘없는 걸 새로 만드는 내는 것은 어렵지만 넘치는 걸 비워내는 작업은 오히려 쉽다’는 말씀이 특히 가슴에 와닿았다”며 “이번 대회에서 잘하려고 이것저것 넣었던 걸 하나씩 비워내면서 오히려 편해졌다”고 했다.
열심히 했는데 번번이 결과가 좋지 않아 코스에 서 있는 자신이 버겁고 불편하고 힘들어 도망가고 싶었던 패배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 ‘오늘은 어떤 걸 해볼까’라는 동기부여가 생길 정도로 코스에 나가는 것 자체가 기쁘고 즐거워졌다.
전인지는 힘든 시기를 그림을 그리면서 버티기도 했다. 미술 활동은 2022년 메이저대회 KPMG 여자 PGA 챔피언십 우승이라는 선물을 안겼다. 그해 겨울에는 서울에서 개인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앞으로도 그림 그리기를 계속할지 궁금했다.
전인지는 “골프가 점점 사랑스러워지니까 그쪽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마음이 지금은 크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고 붓을 아예 놓겠다는 건 아니다. 국내에 작업실이 있어 8개월만의 이번 방문에서도 스케치 몇 점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그림 그리기는 여러 면에서 밸런스를 맞춘다는 의도로 시작했다. 분명 효과가 있었다”며 “그림을 그리기 전에는 ‘즐거워야 해, 즐겁게 해야지’라고 몇 번씩이고 스스로를 세뇌했지만, 이제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림 그리기 이후의 달라진 일상을 소개했다.
전인지는 이번 KB금융 스타챔피언십을 통해 엄청난 ‘힐링’을 맛보았음에도 올해 더 이상의 KLPGA투어 대회 출전은 없을 것이라 했다.
그는 “일단 올 시즌 CME 랭킹 관리하는데 남은 시즌 주력할 생각이다. 따라서 더 이상 국내 대회 출전은 없을 것”이라며 “한국에 오면 나이를 잊고 플레이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자주 오고 싶다. 내년에는 그런 기회를 자주 만들도록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전인지는 올 시즌 CME 글로브 랭킹이 현재 102위로 처져 있다. ‘별들의 전쟁’으로 불리는 시즌 최종전 CME그룹 투어 챔피언십 출전을 위해서는 CME 글로브 랭킹 60위 이내에 들어야 한다. 다만 2022년 메이저대회 우승이 있어 내년 시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자신의 현재 골프 위치를 스트레칭하고 1번 홀을 막 출발하려는 시점이라고 밝힌 전인지는 “20대 중반까지는 30대 이후 내 골프 인생을 생각하면서 그때까지 가능할까 하는 부정적 생각이 컸다”며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현재의 내 몸 상태와 의욕을 감안하면 나이는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강한 자신감을 내보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팬들을 향한 감사 인사도 빼놓지 않았다. 전인지는 “이번 대회에서 나흘 내내 따라 다니며 응원해주신 분들을 비롯해 변함없는 지지와 응원을 보내주신 모든 팬에게 감사드린다”며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이 팬들께 보답하는 길이라는 걸 명심하고 더 열심히 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정대균 골프선임기자 golf5601@kmib.co.kr